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의 크라이스키 수상 기념상

정준극 2008. 12. 16. 19:42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의 크라이스키 수상 기념상

현대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기억되는 정치인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에 있는 크라이스키 수상 흉상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는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오스트리아 수상을 지낸 정치인이다. 크라이스키는 1911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1990년 향년 79세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72세 때까지 수상직을 맡았다. 전후 오스트리아 수상으로서는 가장 고령이었다. 그보다도 그는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초의 유태인 수상이었다. 비록 유태인이라는 핸디캡은 있었지만 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수많은 난제들을 해결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위상을 세계에 높이 떨쳤다. 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기억되는 수상일 것이다. 호프부르크 옆의 수상집무실 (Bds Kanzleramt)과 내무성(BMf Inneres)의 앞길은 브루노 크라이스키 가쎄(Bruno Kreisky Gasse)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수상집무실 옆의 공원은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UNO City의 1층 레스토랑으로 가는 복도의 벽면에는 크라이스키의 유화 초상화가 걸려 있다. 크라이스키 수상이 UNO City의 건설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비엔나시는 그를 비엔나의 영원한 명예시민으로 삼았다. 그리고 UNO City와 연계하여 설립된 오스트리아 센터 앞의 광장은 브루노 크라이스키 광장(Bruno-Kreisky-Platz)이다. 오스트리아 센터(ACV)의 주소도 22구 브루노 크라이스키 플라츠 1번지이다.

 

오스트리아 센터 앞의 광장은 브루노 크라이스키 플라츠이다. 크라이스키 수상이 UNO City의 건설에 기여한 공로 때문이다.


크라이스키는 비엔나에서 유태인 의류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5구 마르가레텐의 쇤브루너 슈트라쎄 122번지이다. 그는 15세 때에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유년대원으로 가입하여 정치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엔나대학교의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34년 당시 수상이던 엥겔베르트 돌푸쓰(Engelbert Dollfuss)가 사회당의 활동을 금지하자 크라이스키는 지하조직에 가담하여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35년 1월 체포되어 반역죄로 선고받았으나 1936년 석방되었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나치는 크라이스키의 정치적 신념과 유태인 혈통을 문제삼아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크라이스키는 스웨덴으로 도피하여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머물렀다.

 

5구 마르가레텐의 쇤브룬너슈트라쎄 122번니 왼쪽에 붉은 원이 있는 건물이 크라이스키 수상이 태어난 집. 붉은 원은 기념 명판

크라이스키 생가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 명판

 

크라이스키는 1946년 5월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스웨덴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 직원으로 임명되어 다시 스웨덴으로 가서 1951년까지 체류했다. 1951년 비엔나에 돌아오자 연방대통령인 테오도르 쾨르너(Theodor Koerner)는 그를 대통령 정치참모로 임명하였다. 정부에서 인정을 받은 그는 1953년 외무성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외무성 차관으로서 그는 1955년 4대국의 오스트리아통치를 마무리하는 오스트리아국가협정의 협상에 참가하여 오스트리아의 독립과 영세중립을 이끌어냈다. 이듬해인 1956년 크라이스키는 의회에 진출하여 사회당 최고위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59년에는 외상이 되어 유럽자유무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또한 영토문제에 있어서도 이탈리아와 해묵은 쟁점이었던 남부 티롤지방 문제를 해결하였고 제3세계에 대한 마샬 플랜(Marshall Plan)을 제안하여 오스트리아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크라이스키는 1967년 선거에서 사회당수로 선출되었고 1970년의 선거에서 사회당이 의석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자 수상이 되었다. 크라이스키에 대한 지지는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 그가 이끄는 사회당은 1975년과 1979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장식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국민들은 크라이스키가 국제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자기만족적이며 또한 선입감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인식하고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크라이스키는 문교상인 프레드 지노봐츠(Fred Sinowatz)에게 수상의 자리를 내주었다. 게다가 건강도 악화되었다. 그는 1984년 신장이식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1990년 7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엔나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브루노 크라이스키 수상


크라이스키는 어떤 정치가였는가? 오스트리아를 위해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가? 오스트리아의 수상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사회를 안정시킨 훌륭한 정치인으로 간주하는 측이 있는가하면 독선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크라이스키가 재임하던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상처를 씻고 경제부흥을 이룩하던 시기였다. 크라이스키의 사회당은 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수상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측근인 법무상 크리스티안 브로다(Christian Broda)와 함께 자유개혁적인 정치를 추구하였다.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자유개혁정치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여러 면에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우선 불가피한 이혼은 허용토록 하는 등 가족법을 개혁하였고 사형제도를 개혁하였다. 또한 낙태를 인정하였고 동성애를 허용하였다. 이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반발이 거셌다. 크라이스키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사회당과의 연맹을 통하여 반발을 무마하였다. 병역에 있어서는 종전의 9개월 의무복무를 개월로 단축하였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병역의무기간은 8개월로 조정되어 있다.

 

5구 마르가레텐의 마르가레텐 전철역 인근에 있는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 입구. 인근에 크라이스키의 생가가 있기 때문에 공원 명칭을 그렇게 붙였다. 그 전에는 장크트 요한 파르크였다.


크라이스키가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근로자에 대한 복지가 확대되었다. 주당 근무시간이 40시간으로 단축되었으며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되었다. 크라이스키 정부는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소수민족이 언어권을 자유롭게 가지도록 했다. 1974년 석유파동이후 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가 석유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원자력발전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원자력발전소를 건설이 추진되었으나 1978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어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크라이스키는 국제문제에 있어서 뛰어난 역할을 했다. 그는 남-북 대화를 주도하였으며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과 마찬가지로 평화와 개발을 위해 노력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의 국가조약에 의해 유럽 연맹(EU)에 가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나 크라이스키는 유럽의 통합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동-서 냉전을 해빙하는 교량역할을 자처하고 나서기도 했다. 미-소간의 전략무기제한협상이 비엔나에서 시작되도록 한 것은 크라이스키의 외교 결과이다.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에 있는 크라이스키 흉상


크라이스키는 시온주의를 반대하였다. 그는 시온주의가 유태민족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아랍세계의 지도자들과 유대를 강화하였다.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리비아의 무아마르 가다피와 같은 아랍 지도자들과 친선을 강화하였으며 1980년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그는 수상이라는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유럽의 유태인 사회당원들이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중재역할을 맡도록 노력하였다. 한때 크라이스키는 이스라엘의 골다 메어(Golda Meir) 수상과 심각한 관계에까지 있었다. 어느때 크라이스키는 자신이야말로 골다 메어 수상이 협박할수 없는 유럽의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말한바 있다.

 

브루노 크라이스키 가쎄의 기념 분수
                

크라이스키는 과거의 나치당원들과 현대의 극우정치인들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크라이스키는 극우주의자인 외르크 하이더(Joerg Haider)를 ‘훌륭한 정치적 재능의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크라이스키에 대적하는 시몬 뷔젠탈(Simon Wiesenthal)이 크라이스키의 내각에 과거 나치로 활동했던 인물이 네명이나 있다고 공격했지만 크라이스키는 문제의 인물들을 내각에서 내보내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뷔젠탈에 대하여 ‘나치 사냥꾼’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사건은 식을줄 모르고 확대되어 뷔젠탈은 크라이스키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였고 법원은 크라이스키가 근거 없는 비방을 했다고 하여 상당액의 벌금을 내도록 선고했다. 1976년, 크라이스키의 65세 생일을 기념하여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공로 재단’(Bruno Kreisky Foundation for Outstanding Achievements in the Area of Human Rights)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매2년마다 세계적으로 인권문제 향상을 위해 노력한 인물들에게 상을 주고 있다. 크라이스키는 말년에 소련 반체제 인사들을 돕는 운동을 벌였다. 예를 들어 그는 소련의 반체제인사인 유리 올로프(Yuri Orlof)의 석방을 요청하는 서한을 소련수상 유리 안드로포프(Yuri Andropov)에게 보냈다. 불행하게도 안드로포프는 크라이스키의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크라이스키 부부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