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미노리텐키르헤 앞의 레오폴드 휘글 기념상

정준극 2008. 12. 16. 19:48

미노리텐키르헤 앞의 레오폴드 휘글 기념상

전후 오스트리아 최초의 수상

 

레오폴드 휘글 기념상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은 기민당(基民黨) 정치인으로서 2차 대전후 오스트리아 초대 수상을 지낸 인물이다. 휘글은 2차 대전후 오스트리아 수상으로서는 가장 젊은 나이에 수상이 되었다. 그는 1902년 남부 오스트리아의 루스트(Rust)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65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를 기념하는 두상이 미노리텐키르헤 정문 앞 길에 세워져 있다. 휘글은 비엔나 자연자원-응용생명과학대학교에서 농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치에 뜻을 둔 그는 1931년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남부오스트리아농민연맹(Bauernbund)의 부의장이 되었고 2년 후에는 의장이 되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직전 수상을 맡았던 엥겔베르트 돌푸쓰가 정치개혁을 추진한 이후 휘글은 돌푸쓰의 연방경제정책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돌푸쓰의 정책을 지원하였다. 휘글은 농민연맹의 의장을 맡은 이후 돌푸쓰로부터 계속 정치적인 후원을 받아 왔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된 직후 나치는 휘글을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휘글은 그곳에서 5년을 지낸후 1943년 5월에 석방되었다. 정치활동을 할수 없었던 휘글은 석유기술자가 되어 일했다. 그러나 1944년 10월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나치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마우타우젠(Mauthausen)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45년 2월 휘들은 반역죄로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사형집행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집행되지 않아 생명을 건질수 있었다.


미노리텐플라츠. 오른쪽에 레오폴드 휘글 기념비가 있다.


나치가 몰락한후 오스트리아는 4개국 연합국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형식이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러시아군 사령관은 휘글에게 비엔나 시민들에게 배급할 식량을 조달하라고 요청했다. 휘글은 농민연맹을 통하여 가까스로 식량을 조달할수 있었다. 휘글의 위상은 높아졌다. 얼마후 그는 농민연맹을 재정비하여 오스트리아 인민당(ÖVP)에 통합하였다. 휘글은 오스트리아 인민당의 부당수가 되었고 며칠 후에는 남부 오스트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다. 오스트리아 자유선거가 1934년 이후 처음으로 1945년 12월에 있었다. 휘글의 인민당은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 휘글은 수상으로 추천되었고 휘글을 신임하던 러시아도 이에 동의하였다. 러시아는 휘글이 나치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던 점과 행정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휘글이 43세 때였다. 휘글은 국민들 사이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그에 대한 조크가 많았던 것도 그에 대한 인기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과의 ‘Wine Policy’, 그리고 ‘러시아 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휘글에 대한 인기도 시들해졌다. 반대당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휘글은 1953년 11월 수상직을 사임했다. 후임은 사회당에 유연성을 보인 율리우스 라브(Julius Raab)였다. 휘글은 외무장관으로 남아 있으면서 1955년 5월 15일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서 영세중립을 지향한다는 국가조약이 맺어지도록 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휘글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된 사람은 브루노 크라이스키였다.

 


 레오폴드 휘글(가운데), 브루노 크라이스키(왼쪽), 소련 외상 비야체슬라브 몰로토프. 1955년 5월 비엔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