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히칭거하우푸트슈트라쎄의 에곤 쉴러 기념 명판

정준극 2008. 12. 17. 09:03

 

히칭거하우푸트슈트라쎄의 에곤 쉴러 기념 명판

 

 히칭거-하우푸트슈트라쎄 101번지는 에곤 쉴러가 세상을 떠난 집이다. 이를 기념하여 히칭예술연맹이 명판을 제작하여 설치했다.


 

에곤 쉴러(Egon Schiele)는 오스트리아의 화가로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계자이다. 쉴러는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뛰어난 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집중력으로 응집되어 있다. 그는 상당수의 자화상을 그렸다. 자화상에서 보여준 뒤틀린 몸체와 강렬한 선은 초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스타일은 아르 누보(Jugendstil)에 해당한다. 쉴러의 주요 작품은 비엔나의 레오폴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엔나 사람들은 쉴레라고 발음하지 않고 쉴러라고 발음한다.)


에곤 쉴러는 다뉴브강변의 툴른(Tulln)이라는 마을에서 1890년 6월 12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국영철도의 툴른역장이었다. 어머니는 보헤미아의 크루마우(Krumau) 출신이었다. 쉴러는 어린시절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이학교의 예술교사가 쉴러의 예술적 재능을 보고 열심히 후원하였다. 쉴러가 15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쉴러는 외삼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외삼촌도 쉴러의 예술적 재능과 열정을 보고 화가가 될것을 권고하였다. 1906년 쉴러는 비엔나의 ‘예술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에 응시하였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한때 다녔던 학교이다. 이 학교의 교수들은 쉴러가 학생으로 들어온지 1년도 되지 않아 ‘이 학생은 예술공예학교에 적합하지 않다. 더 전문적인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쉴러는 그 해에 비엔나 미술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로 옮겨 소묘와 회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보수적이어서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쉴러가 이 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07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입학하려다가 거절당했다. 만일 히틀러가 입학을 했디만 세계2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르며 6백만명에 이르는 유태인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간 쉴러는 아르 누보를 이끌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존경하여 그의 제자가 되기로 자청하였다. 클림트는 20대 초반의 젊은 화가지망생인 쉴러는 친절하게 보살펴 주었다. 클림트는 쉴러의 작품을 사주기도 하고 자기의 작품과 교환하기도 했으며 모델을 주선해 주는가 하면 후원자를 물색하여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또한 클림트는 쉴러를 제세씨온(Secession)과 관련하여 열리는 비엔나 예술워크샵(Werkstätte)에 참석토록 지원해 주었다. 1908년 쉴러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미술아카데미의 3년 과정만 마치고 학교를 중퇴하여 보수적인 교육에 회의를 느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신예술그룹’(Neukunstgruppe)을 창립하였다.


네그루의 나무


클림트는 쉴러는 계속 후원하였다. 1909년에는 쉴러의 작품들을 비엔나 예술전시회(Kunstschau)에 출품토록 주선해 주었다. 쉴러는 이 전시회에서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얀 토로프(Jan Toorop),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등을 만나 표현에 대한 안목을 넓히게 되었으며 이들의 작품을 통해 그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정리하였다. 미술아카데미의 속박에서 벗어난 쉴러는 인간의 내면적인 모습, 인간의 성적인 관심, 죽음 등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쉴러는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이러한 감각에서 태어난 작품들은 일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백하다고 볼수 있지만 전통적인 심미안에 혼돈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11년 쉴러는 당시 17세의 봘리(Wally)라는 아가씨를 만났다. 원래 이름은 발레리 노이칠(Valerie Neuzil)로서 한때 클림트의 모델을 했고 클림트의 정부라는 소문이 있었던 아가씨이다. 봘리는 쉴러의 모델이 되었고 곧 이어 두 사람은 동거하기 시작했다. 쉴러의 몇몇 충격적인 작품은 이때에 봘리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쉴러와 봘리에 대하여 주변의 눈총이 만만치 않자 두 사람은 이른바 고리타분한 비엔나에서 탈출키로 한다. 두 사람은 남부 보헤미아의 체스키 크룸로프(Cesky Krumlov)라는 한적한 마을로 도피한다. 몰다우 강변의 크룸로프는 쉴러의 어머니가 탄생한 크루마우이다. 오늘날 크룸로프에는 에곤 쉴러 기념관이 있다.크룸로프가 비록 쉴러의 어머니의 고향이지만 크룸로프의 주민들은 젊은 두 사람의 괴이한 생활을 비난했다. 더구나 쉴러가 마을의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삼아 누드 그림을 그리자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두 사람을 마을에서 추방하였다.  


'가족'. 1918년


남부 보헤미아의 크룸로프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비엔나 서쪽 35km 지점의 노이렝바흐(Neulengbach)라는 마을에 정착하고 허름한 아틀리에를 마련하였다. 노이렝바흐는 비엔나 도심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쉴러의 아틀리에에는 비엔나의 불량 청소년들이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은 쉴러의 생활 태도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1912년 쉴러는 미성년 소녀를 유혹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경찰관들은 쉴러의 아틀리에에서 수백장에 이르는 난잡한 그림들, 즉 포르노에 가까운 그림들을 발견하고 모두 압수하였다. 쉴러는 재판에서 미성년자 유혹과 납치 등의 죄목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선정적인 그림들을 어린이들이 볼수 있는 곳에 두었다는 죄목으로 24일간의 구류를 선고받았다. 재판장은 상징적으로 쉴러의 그림 한 장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촛불에 태워 없앴다. 쉴러는 재판을 받기 전에 이미 21일을 유치장에서 보냈으므로 이를 감안하여 3일만 더 유치장에서 지내면 되었다. 쉴러는 유치장에 있을 때 감옥에 갇혀 있는 어려움과 불편함을 12장의 시리즈 그림으로 만들었다.


'포옹'


1914년, 쉴러는 비엔나 교외인 히칭(Hietzing)으로 거처를 옮겼다. 히칭거 하우프트슈트라쎄(Hietzinger Hauptstrasse) 101번지이다. 그의 화실 건너편에는 에디트(Edith)-아델레 함스(Adele Harms)라는 자매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자매의 아버지는 자물쇠 장인이었고 종교는 개신교였다. 1915년 쉴러는 두 자매중 보다 사교적인 에디트와 결혼하였다. 쉴러가 그동안 함께 지낸 봘리에게 에디트라는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봘리는 화를 내고 쉴러를 떠났다. 사실 쉴러는 비록 에디트와 결혼하더라도 봘리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봘 리가 떠나자 쉴러는 낙담에 빠진다. 그 때 그린 작품이 ‘죽음과 소녀’(Tod und Mädchen)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봘리이다. 그러나 저러나 쉴러는 1915년 6월 17일 에디트와 결혼한다. 쉴러의 부모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에디트의 부모는 미치광이와 같은 쉴러와 에디트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처럼 에디트는 쉴러가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고 버티어 겨우 결혼 승낙을 받았다.  


그러는 와중에 1차대전이 일어났다. 결혼한지 3일후 쉴러는 제국의 군대에 입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쉴러는 프라하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재능으로 장교들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쉴러가 하는 일은 러시아 포로들을 감시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그림이나 그리면서 지내는 것이었다. 전투라는 것은 구경하지도 못하고 지냈다. 1917년, 전쟁이 끝나기 전해에 쉴러는 제대하여 비엔나로 돌아왔다. 비엔나에서 그는 온전히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였다. 작품은 그의 재능을 최대로 표현한 성숙한 것들이었다. 그는 1918년 제세씨온 제49회 전시회에 50여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쉴러는 이 전시회의 포스터도 제작하였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예수께서 앉은 자리에 자기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이 쉴러에게 초상화 제작을 주문하였다. 이후 쉴러는 유럽의 여러 곳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듬해인 1918년 가을, 스페인독감이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다. 2천만명이 독감에 걸려 고생을 했다. 더러는 치명적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비엔나에도 찾아왔다. 쉴러의 부인인 에디트가 독감에 걸렸다. 그때 에디트는 임신 6개월이었다. 에디트는 가을을 넘기지 못하게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3일후인 10월 31일, 쉴러도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쉴러는 에디트를 모델로 몇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에곤 쉴러의 자화상. 1912년. 비엔나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