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음악가

누쓰도르프의 레하르-쉬카네더 기념관(Lehár-Schikaneder-Schlössl)

정준극 2009. 11. 24. 08:03

레하르-쉬카네더 기념관

되블링의 레하르 쉬카네더 저택

 

프란츠 레하르. 1918년. 되블링의 자택에서(현재의 레하르-쉬카네더 슐뢰슬)

 

비엔나 제19구 되블링의 누쓰도르프(Nussdorf)에 쉬카네더-레하르 기념관이 있다. 주소는 하크호퍼가쎄(Hackhofergasse) 18번지이다. 보통 간단히 레하르 슐뢰쓸이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호이리거 주점들이 늘어서 있는 지역이다. 이 집에서 모차르트의 친구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가 1802년부터 1812년까지 10년동안 살았다. 쉬카네더는 이 곳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대본을 썼다. 쉬카네더는 1791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자기의 극단이 소속되어 있는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뷔덴극장)에서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를 초연하였다. 쉬카네더는 배우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바리톤이었다.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파파게노 역을 맡았으며 그의 세 아들은 세 소년의 역할을 맡았다. 쉬카네더가 살던 누쓰도르프의 저택에서는 1932년부터 1940년까지는 프란츠 레하르가 살았다. 레하르는 이 집에서 오페레타 '주디타'(Giuditta)를 작곡했다. 비엔나는 두 사람의 유명 인사가 살았던 집이므로 '쉬카네더-레하르의 소궁전(Lehár-Schikaneder-Schlössl)'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말하자면 유형문화재로서 기념하고 있다. 이 집의 거실에는 쉬카네더와 레하르를 기념하는 악보, 사진,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쉬카네더-레하르 저택은 개인소유이므로 항상 개방하고 있지 않다. 사전 요청에 의해서만이 겨우 관람할수 있다. 쉬카네더-레하르 슐레쎌은 일찍이 1737년에 지은 바로크 양식의 저택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상당부분을 아름답게 개조하였으며 오늘날 대연회장에는 무대를 만들어서 소규모의 콘서트와 오페레타도 공연한다. 레하르 슐뢰쓸에서의 음악회를 '레하리아데'(Leháriade)라고 부른다. 봄페스티발, 가을페스티발로 나뉘어서 연주회를 갖는다. 되블링구청이 주관한다.

 

레하르 슐뢰쎌(작은 궁전). 원래 1737년에 지은 집이지만 그후 많은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레하르가 이 저택에서 살고 있을 때에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과 합병되었다. 이어서 유태인들에 대한  나치의 사냥이 시작되었다. 레하르의 부인인 조피(Sophie)는 유태인이었다. 레하르와 결혼하여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나치의 블랙 리스트에 들어 있을수 밖에 없었다. 나치는 조피가 유명한 레하르의 부인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찌하지 못했다. 레하르는 '설마 저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잔인한 박해가 강화되자 레하르도 불안 속에 살아야 했다. 드디어 레하르는 비엔나를 떠날 결심을 하고 1940년 부인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의 취리히로 떠났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저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오겠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도피였다. 레하르는 취리히에서 전쟁이 곧 끝날줄로 생각하고 처소를 마련하지 않고 임시로 취리히 호반의 바우르(Baur)호텔에서 지냈다. 그러던중 취리히에 온지 2년이 지난 때에 부인이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레하르는 상심으로 나날을 보냈다. 조피는 취리히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레하르 슐뢰쓸에서의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공연 

 

한편, 비엔나에 있을 때 레하르를 도와 대본을 쓰던 유태인 프릿츠 뢰너-베다(Fritz Löhner-Beda)는 나치에 의해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 갔다가 나중에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종전이 임박하여서는 아우슈비츠로 옮겨져 불행하게도 죽임을 당했다. 뢰너-베다는 부헨발트 수용소에 있을 때에 유명한 부헨발트의 노래(Buchenwaldlied)를 썼다. 레하르는 결과적으로 나치 때문에 사랑하는 부인을 일찍 저세상으로 보냈고 또한 가장 절친했던 동료이자 친구인 뢰너-베다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서 죽임을 당하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고 비엔나에 돌아온 레하르는 누쓰도르프의 저택에서 살지 않고 저 멀리 잘츠부르크 방면의 바드-이슐에 저택을 마련해서 조용히 살다가 1948년에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드 이슐의 레하르 하우스는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레하르 슐뢰쎌에 부착되어 있는 레하르 기념 명판. 그는 즐거움을 주며 슬픔을 잊는 음악을 창조했다는 내용이다.  

대본가이며 흥행가 겸 성악가인 에마누엘 쉬카네더(1751-1812) 기념명판.

 

레하르 슐레쎄(쉬카네더 슐뢰쎌) 기념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