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폭스가르텐의 프란츠 그릴파르저 기념상

정준극 2008. 12. 26. 14:24

폭스가르텐의 프란츠 그릴파르저 기념상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극작가인 프란츠 그릴파르처

 

프란츠 그릴파르저(Franz Grillparzer)의 기념상은 폭스가르텐의 남쪽 방향에 화려하게 서있다. 화려하다고 말한 것은 그의 기념상 뒤편으로 마치 병풍처럼 그의 대표작들의 장면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둘러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포(Sappho), 오토카르왕의 행운과 종말(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 리부싸(Libussa), 메데아(Medea) 등이다. 그릴파르저의 비극들은 오늘날에도 오스트리아의 극장에서 자주 공연되는 최고의 드라마들이다. 프란츠 그릴파르저는 1791년(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 비엔나에서 태어났으며 1872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엔나 히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폭스가르텐의 그릴파르저 기념상


그릴파르저는 어려운 소년시기를 겪으며 지냈다. 아버지가 18세 때에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처음에는 궁정도서관의 사서직으로 들어갔으나 무보수였다. 얼마후 남부오스트리아 세무서의 직원으로 들어가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갈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우연히 재무장관인 슈타디온(Stadion)백작을 알게 되어 1818년 그의 추천으로 호프부르크극장(Hofburgtheater)의 시인으로 임명될수 있었다. 이로부터 그릴파르저는 극작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1817년 첫 비극작품인 ‘할머니’(Die Ahnfrau: The Ancestress)를 내놓았다.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무대에 올려지지는 않았지만 ‘할머니’를 내놓기 전에 이미 ‘카스틸렌의 블랑카’(Blanca von Castilien)을 완성한바 있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를 모델로 한 작품이었다. ‘할머니’는 소름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비극이지만 그릴파르저는 진실로 시적인 아름다움을 부과하여 드라마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 기념우표


1821년 그릴파르저는 그의 대표작인 ‘황금 양털’(Das goldene Vlies) 3부작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1819년부터 착수하였지만 그의 어머니가 좌절감으로 자살하는 바람에 늦어졌다. ‘메데아’(Medea)는 과거에 여러 사람들이 드라마의 주제로 삼은 것이지만 그릴파르저는 종전의 것들보다는 더 웅장한 스케일로 제작하였다. 역사적 비극인 ‘오트카르왕의 행운과 종말’(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은 보헤미나의 오토카르2세와 독일의 루돌프1세와의 분규를 다룬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로 2년후에야 무대에 올릴수 있었다. 그 외에도 그릴파르저는 수많은 드라마를 창조하여 오스트리아 극장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폭스가르텐의 프란츠 그릴파르처 기념상 전경


그릴파르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Weh dem, der lügt’(슬프도다, 거짓말하는 자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실패로 그는 독일극장과 작별을 고하였다. 그는 1872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앙공동묘지의 저명인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릴파르저의 업적을 찬양하여 파스트리(과자)의 하나를 그릴파르저토르테(Grillparzertorte)라고 이름 붙였다. 비엔나시는 비엔나대학교와 라트하우스(시청) 사이에 있는 거리를 그릴파르저슈트라쎄(Grillparzerstrasse)라고 이름 붙였다. 

 

그릴파르저의 연극인 '사포' '메데' 등의 장면 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