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독토르 칼-루에거-플라츠의 뤼거 시장 기념상

정준극 2008. 12. 26. 14:08

독토르 칼-루에거-플라츠의 루에거 시장 기념상

 


독토르-칼-루에거-플라츠의 루에거시장 기념상

 

비엔나 시내에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치하에서 비엔나 시장을 지낸 독토르 칼-루에거(Dr.-Karl-Lueger)를 기념하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 링슈트라쎄에서 시청(Rathaus) 앞의 대로가 독토르-칼-루에거 링(Dr.-Karl-Lueger Ring)이다. 슈투벤링(Stubenring)이 시작되는 곳과 볼차일레(Wollzeile)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작은 광장은 독토르-칼-루에거-플라츠(Dr.-Karl-Lueger-Platz)이다. 이곳에 루에거 박사의 기념상이 엄숙하게 서있다.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에 있는 프리드호프키르헤(묘역교회)도 칼-루에거-교회(Karl-Lueger Kirche)라고 부른다. 성보로메우스에게 봉헌된 교회이지만 루에거 박사가 비엔나 시장일 때에 건설한 교회이기 때문에 칼-루에거교회라고 부른다. 중앙공동묘지의 제2문도 독토르 칼 루에거 토르라고 부른다. 비엔나시는 칼 루에거 시장을 좋던 싫던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칼 뤼거 교회의 중앙제단

                         

칼 루에거는 1844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1910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97년부터 191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비엔나 시장을 지내면서 뛰어난 행정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뤼거는 비엔나대학교에서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사회당(기사당: Christian Social Party)을 창설하여 비엔나에 있는 독일의 진보주의자들의 정치세력을 무력화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또한 사회민주당(사민당)과도 투쟁하여 기사당이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도록 하였다. 기사당은 오스트리아의회에서 비록 소수당이었지만 1895년 비엔나 시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여 결국 뤼거를 비엔나 시장으로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개인적으로 루에거를 혐오하였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국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에거의 비엔나 시장 임명을 세 번이나 거절하였다. 하지만 1897년 기사당이 선거에서 다시 승리하자 루에거를 시장으로 임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루에거는 뛰어난 행정력으로 비엔나 시장의 직분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1910년 루에거가 서거하자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비엔나의 수호자’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독토르 칼 루에거 플라츠

 

루에거시장은 비엔나 시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제2의 식수 수원지를 건설하여 시민들에게 양질의 수돗물을 제공토록 한 것은 수많은 업적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오늘날 비엔나처럼 도시 교통망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비엔나 교통망은 루에거가 시장으로 재임중에 완성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지하철 건설계획까지 검토하였다. 오늘날 비엔나에는 전체 5개 노선의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다. 루에거의 정치 스타일은 훗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우익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이그나즈 자이펠(Ignaz Seipel), 엥겔베르트 돌푸쓰(Engelbert Dollfuss), 쿠르트 슈슈니그(Kurt Schuschnigg)등이 루에거 시장으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히틀러와는 달리 반유태주의자들은 아니었지만 대신 공산사회주의는 반대하였다. 

 

 칼 루에거 비엔나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