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네스트로이플라츠의 네스트로이 기념상

정준극 2008. 12. 26. 14:11

네스트로이플라츠의 네스트로이 기념상

오스트리아의 셰익스피어

 

요한 네스트로이 기념상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네스트로이플라츠(Nestroyplatz)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위대한 배우 겸 성악가이며 극작가인 요한 네스트로이(Johann Nestroy)를 기념하여 붙인 지명이다. 네스트로이의 기념상은 U1의 네스트로이플라츠역에서 프라터슈트라쎄(Praterstrasse)를 따라 도나우 카날 쪽으로 가는 곳의 한적한 길모퉁이에 있다. 현재의 네스트로이플라츠에는 예전에 칼스테아터(Karlstheater)가 있었다. 네스트로이는 칼극장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래서 칼극장이 있던 지명을 네스트로이플라츠라고 부르게 되었고 네스트로이플라츠의 한쪽 코너에 요한 네스트로이의 기념상을 세운 것이다. 네스트로이는 1801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는 성악을 공부하여 오페라 성악가가 되었다. 네스트로이는 오페라 성악가로서 1822년부터 1831년까지 거의 10년동안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오페라에 출연하였다. 그후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의 무대경험을 살려서 연극대본을 쓰고 직접 배우로서 출연하기 시작했다. 첫 작품인 룸파시바가분두스(Lumpacivagabundus)는 대성공이었다. 극장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네스트로이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무대에서 살아 있는 것이었다. 네스트로이는 극작가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오스트리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렀다. 네스트로이는 오스트리아의 문화계에서 중요한 인사가 되었다.

 

요한 네스트로이 


네스트로이는 비엔나의 위대한 극작가인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의 뒤를 이어 비엔나의 연극을 높이 발전시킨 인물이다. 라이문트가 낭만적이며 환상적인 내용에 치중한데 비하여 네스트로이는 해학과 비평에 중점을 두었다. 네스트로이가 활동하던 시절은 보수적 재상인 클레멘스 메테르니히(Clemens Metternich)의 시대였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엄격히 통제되던 때였다. 네스트로이의 비판적인 글들은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차원을 달리해야 했다. 네스트로이의 단어선택은 전설적이었다. 연극의 출연자들은 비엔나 방언을 자주 사용하였다. 비엔나 방언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수 있는 묘미가 많았다. 비엔나 방언을 쓰는 대사는 고도로 교양 있는 연설보다도 더 사랑을 받았다. 원래 성악가였던 네스트로이는 연극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연극에서 중요한 대목의 하이라이트를 노래로 표현토록 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였다.

 

연극 '탈리스만'의 가발장면


네스트로이는 1840년대와 50년대에 거의 80편의 작품을 썼다. 그중에서 아직까지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은 앞서 말한 ‘룸피시바가분두스’를 비롯하여 ‘사랑이야기와 결혼사건’(Liebesgeschichten und Heiratssachen), '탈리스만'(Der Talisman)등이다. ‘탈리스만’은 에드문트니크(Edmund Nick)라는 사람이 ‘디도의 카리에 만들기’(Titus macht Karriere)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작곡하였다. 네스트로이는 1862년 린츠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 일반 독일어로 재구성되어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폭넓게 공연될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풍자의 멋과 맛은 잃지 않도록 편집되었다. 네스트로이의 연극은 오늘날에도 비엔나의 연극극장에서 공연되는 작품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네스트로이의 작품은 영어로 번역된 것이 거의 없다. 다만 Einen Jux will er sich machen(농담 만들기)은 영어로 번역되어 훗날 손튼 와일더(Thornton Wilder)의 ‘중매장이’(The Matchmaker)로 각색되었으며 이어 뮤지컬 ‘헬로 돌리’(Hello, Dolly)가 되었다.

 

요한 네스트로이 기념우표


1876년 비엔나 도심과 도나우슈타트를 연결하는 도나우강의 라이히스브뤼케(Reichsbrücke: 제국대교)가 붕괴되고 다시 건설키 위해 공모에 들어갔을 때 계약을 따낸 콘소시엄의 명칭은 ‘요한 네스트로이’였다. 그래서 제국대교라는 명칭 대신에 ‘네스트로이 대교’라는 명칭이 붙을 뻔 했지만 제국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비엔나사람들은 ‘제국대교’(라이히스브뤼케)라는 명칭을 선호하였다.

 

바드 이슐에 있는 요한 네스트로이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