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북촌길

정준극 2009. 3. 5. 11:57

북촌길


서울시내의 중심에 아직도 옛 서울의 모습이 남아 있는 한적한 전통기와집 지역이 있다는 것은 흐믓한 일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이나 2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북촌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서울에서 최길지(最吉地)는 경복궁이며 다음이 창덕궁(비원)이라고 한다. 이지역은 이른바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태로서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배수가 잘되고 게다가 앞쪽으로는 남산을 바라보므로 시야가 확 트인 곳이어서 길지라는 것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두 길지를 연결하는 지역이 북촌이다. 사람들은 이 지역이 청계천과 종로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북촌이라고 불렀다. 종로구의 가회동, 재동, 소격동, 계동, 사간동, 그리고 안국동, 삼청동, 원서동의 일부가 서울의 명물 북촌에 속한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지역이므로 왕족들이나 고관대작들이 주로 살았다. 하기야 북촌에는 종친부 사무실도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대문이 그럴듯한 집들을 많이 볼수있다. 반면, 남촌은 지금의 필동과 남산동,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양반집 자손들이지만 조정의 고위직으로 출사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급관리들이 많이 살았다. 남산골샌님이라는 말은 남촌에 사는 주변머리 없는 양반집 자손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삼청동길의 북촌길 안내표지들. 볼거리가 많은 거리이다.

                                                  

북촌이라고 하면 남촌에 비하여 무언가 썰렁하다는 느낌을 준다. 남촌은 ‘산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라는 약간 간드러진 노래가 있고 남대문시장이 있기 때문에 따듯하고 친근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북촌과 관련하여서는 그런 노래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서늘하고 한적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실제의 북촌은 그렇지 않다. 서울에서 북촌만큼 아늑하고 정겨운 곳도 없다는 얘기들이다. 실로 콘크리트 구조물로 발 붙일 틈이 없는 서울에서 그나마 고색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촌의 이곳저곳에는 근대 한국의 역사를 조명할수 있는 장소들이 산해하여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역사공부에 도움이 되는 지역이다. 북촌에는 조선후기의 명문가들이 많이 살았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의 집이 있고 이상재 선생이 살던 집이 있으며 손병희 선생이 살던 집도 있다. 윤보선 전대통령이 살던 집은 북촌에서 유명하다. 서울시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덕성여고 뒤에

있는 안동교회는 현대식 건물로 확장되었지만 원래 소유하고 있던 기와집 한 채를 보수하여 소허당(笑虛堂)이라는 별채로 주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허심의 마음으로 기쁘게 웃는 집이라는 뜻이다. 잘하면 따듯한 전통차를 마음 편하게 마실수 있다. 안동교회는 2009년에 창립 1백주년을 맞이했다. 안동교회는 서울에서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교회라고 한다. 북촌에 있기 때문에 한때는 양반교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안동별궁이던가?

                                

북촌 마을에는 전통 공예방과 골동품 상점들과 화랑과 출판사 등 문화예술을 지키는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전통적인 운치를 더해주는 건물들이다. 북촌길은 관광객과 중국산 기념품으로 뒤덮인 인사동과는 다른 또하나의 서울 풍물이다. 북촌길은 비교적 한갓지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두루 두루 살피면서 산책하기에 좋다. 이와 함께 조그만 박물관들도 여럿이나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할수 있다. 장신구박물관도 있고 한국불교미술박물관도 있다. 아트선재센터가 있으며 서울 닭문화관이 있다. 북촌생활사박물관은 문물교환까지 할수 있는 흥미 있는 곳이다. 실크로드박물관이 있으며 티베트박물관이 있다. 민화박물관(가회박물관)도 있고 부엉이 박물관, 토이키노박물관, 여기에 서울시 교육사료관까지 있다. 그런데 요즘 한옥들이 자꾸 사라지는 것 같다는 얘기다. 대신 기회만 있으면 현대식 건물들이 연거푸 들어서고 있어서 속상하다는 말을 한다. 북촌을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허전할 것이다. 사실 파란만장한 근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북촌은 오랜 시간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전통을 존중하는 시류에 따라 북촌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전에 이 지역은 학교들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경기고등학교를 비롯해서 휘문, 창덕, 덕성, 풍문여고가 모두 북촌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래서 등하교 시간에는 각각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그나마 좁아빠진 골목길들이 메어질 지경이었다. 지금은 거의 모두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서울시는 최근 북촌을 한옥보존마을로 지정했다. 온동리 시민들은 제발 바라건대 이름값을 하는 동네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상당수 국민들이 피와 같은 세금만 축내고 있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헌법재판소도 북촌에 있다. 헌법재판소가 전통한옥마을의 한가운데에, 그것도 필요 이상의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오래되었지만 헌법재판소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윤보선가의 담장과 헌법재판소는 담장을 맞대고 있다. 헌법재판소 자리는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성제일여고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다가 경성제일여고가 경기여고라는 이름으로 정동 미국대사관저 옆으로 이사를 간후에 도무지 헌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별궁길


헌법재판소 정문에서 오른편으로 걸어가 북서쪽으로 쳐다보면 백송이 보인다. 천연기념물 8호인  유명한 ‘재동 백송’이다. 수령 600년이 넘는 백송은 그동안 여러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긴 끝에 지금은 철제빔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명분을 보여주고 있다. 백송 앞에는 ‘박규수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박규수의 집터와 담을 사이에 두고 홍영식 집이 있었다. 박규수는 개화의 파도가 밀려오던 19세기 중반 개화파의 스승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조선의 근대사는 박규수(1807~1877)라는 인물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박규수는 북촌 일대의 양반 엘리트를 모아 개화사상을 가르친다.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인 사람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박영교, 서재필 등이었다.

 

북촌 골목길

                         

정독도서관 자리는 옛 경기고교 자리이다. 이곳에 올라가다보면 대나무 숲에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집터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옛 풍문여고자리는 안동별궁이었다. 별궁은 세자가 혼례를 올리던 곳으로 그래서 별궁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독도서관 매표소를 지나 정문을 바라보며 오른쪽 길로 가면 종친부(宗親府)가 있고, 그 앞쪽에 ‘김옥균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조선조 말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개혁의 선구자 고균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조선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거목이 약 400년의 시차(時差)를 두고 같은 장소에서 정치적 포부를 키웠다. 일제는 이곳에 경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보를 세웠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 1866~1951)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7살 때 서울에 올라와 정독도서관 동쪽에서 살았다. 지금 가회동 동사무소가 있는 자리는 월남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이 살던 집터로서 표지판이 있고 그 옆에는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孫秉熙: 1862~1922) 선생이 살던 집터다. 조선조 말의 개화운동과 일제하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걸출한 인물들이 같은 시대에 걸어서 10분도 안걸리는 북촌의 하늘 밑에 살았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안동장로교회의 소허당


재동초등학교 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풍년상회라는 낡은 간판의 집이 나타난다. 자유당 시절, 국회부의장을 지내며 날던 새도 떨어트릴수 있는 권세를 가진 이기붕씨가 권력을 잡기 전에 부인 박마리아여사와 함께 이 가게에서 콩나물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가게 이름도 풍년상회였다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커다란 한옥대문이 보인다. 한성은행장을 지낸 친일파의 거두 한상용의 옛집이라고 한다. 지방문화재인 이 한옥은 현재 두산그룹에서 매입해 연강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한적한 북촌마을에 특허사무소가 하나 있다. 박경재(朴慶宰) 법률특허사무소이다. 그 앞길은 인촌길이다. 골목 안쪽에 인촌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살던 집이 있다. 그 앞집은 일제 시대 조선 제일의 부자였던 화신상회의 박흥식(朴興植)씨가 살던 집이다. 정주영씨는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내가 나중에 부자가 되어 저 집을 꼭 산다”고 했는데, 실제로 정주영씨는 이 집을 사서 약 1년 가까이 살았다고 한다. 계동 현대그룹 사옥은 휘문중학이 있던 자리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계동은 광복 후 중요한 정치 집회가 많이 열렸다. 1945년 8월 16일, 좌익 지도자 여운형(呂運亨) 건국준비위원장은 휘문중학 운동장에서 수천명의 군중에게 건국의 당위성에 대하여 연설했다고 한다. 여운형의 옛 집은 휘문중학 운동장 뒤쪽에 있다.

 

윤보선 전대통령 집

                                                               

북촌에는 북촌 나름의 식당들이 있다. 북촌 설렁탕집과 북촌칼국수 집은 유명하다. 또 북촌냉면집도 평양식 냉면으로 유명하다. 북촌냉면집의 주인은 전에 을지로 중앙극장 옆의 평래옥에서 주방장을 했었다고 한다. 이밖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찻집들이 더러 있어서 고단한 다리를 쉴수 있다. 북촌은 서울 관광의 명소로서 서서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다만, 지나치게 상업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차시설! 이것만큼은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다. 길거리마다 거주자 우선 주차선을 그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 놓고 걸어다닐수 있는 인도가 없다. 차없는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울시가 전통한옥마을로 지정하고 육성하기로 했으면 자동차들이(특히 외제 수입차들이) 북촌의 거리를 점거하고 있도록 방치해 두면 곤란하다. 인사동에 스타벅스가 들어오게 되자 기존의 상인들이 거세게 반대했던 일이 있다. 전통거리에 웬 놈의 스타벅스 커피점이란 말이냐는 주장이었다. 스타벅스 커피점을 개점하도록 허가해준 정신없는 당국이 문제였다. 아무튼 스타벅스는 간판을 영어로 내걸지 못하고 한글로 썼다. 북촌에 외제차 출입을 금해야 한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공용주차장을 만들어서 북촌의 골목길들을 막고 주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북촌의 명물 설렁탕집. 그나저나 자동차들이 없어야...

 이건 그냥 밥점. 멀리서도 밥이라고 써놓은 글자가 잘 보여 배고픔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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