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덕궁과 비원

강녕전 옮겨 놓은 희정당

정준극 2009. 3. 23. 11:48

강녕전을 옮겨 놓은 희정당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은 인정전이다. 그러나 왕이 실질적으로 가장 많이 머물렀던 건물은 희정당(熙政堂)이다. 하기야 그 넓은 인정전에서 매일 지낼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편전인 선정전이 있다. 하지만 선정전은 간혹 돌아가신 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업무를 보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원래 희정당은 왕의 침전이었다. 1917년 일제시대에 창덕궁에 원인모를 대화재가 발생했다. 희정당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일제는 1920년 순종이 편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희정당을 복원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해체하여 목재를 가져와 사용했다. 그래서 희정당의 지붕의 한쪽에는 康(강)자가, 반대쪽에는 寧(녕)자가 적혀있다. 55칸 강녕전을 옮겨지었으므로 희정당 일대의 구도는 매우 비좁게 되어 있다. 희정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바짝 붙여서 만드느라고 가파르다.

 

 

 희정당 지붕에 써넣은 康(강)자.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겼기 때문에 양쪽으로 강자와 녕자를 써넣었다.

 

1917년의 화재는 희정당의 옆에 있는 대조전(大造殿)에서 시작되었다. 대조전의 왕비의 거처이다. 이 화재는 단순한 실화가 아니라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되었지만 증거가 없었다. 일제는 소실된 창덕궁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에 있는 수많은 전각들을 헐었다. 결국 창덕궁과 경복궁이 모두 훼손되었다. 대조전은 경복궁의 중전인 교태전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대조전의 내부도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천정에 샹들리에를 달았으며 창문은 모두 유리창으로 교체하였고 마루에는 카펫을 깔았다.

 

희정당 내부.

 

'오궁 일화 > 창덕궁과 비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화를 맛보다  (0) 2009.03.23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  (0) 2009.03.23
캐딜락을 탔던 순종  (0) 2009.03.23
청기와집 선정전(宣政殿)  (0) 2009.03.23
모던 인정전(仁政殿)  (0) 2009.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