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落星垈)
고려시대의 유적지는 개성에 많을 것이다. 선죽교 등등! 하지만 서울에는 당연히 거의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서울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런 중에 다행하다고나 할까? 지금은 서울로 편입된 관악구 봉천동에 낙성대(落星垈)가 있다. 낙성대라는 말은 초등학생들도 다 잘 알다시피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강감찬 장군께서 태어나실 때에 마치 이를 만천하에 알리듯 밤중만 하여 큰 별 하나가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 장군께서 태어나시었다. 실제로 장군이 태어나신 장소는 현재의 낙성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세를 위한 사적지로서 낙성대를 조성하다보니 장군이 태어났다고 하는 바로 그 장소는 협소하여 사당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현위치에 사당을 짓고 낙성대공원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낙성대에 세워진 강감찬 장군 사당은 안국사(安國祠)이다. 안국사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강감찬 장군의 업적은 낙성대 유적지에 있는 사적비에 자세히 적혀 있다. 사적비의 문장은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선생께서 지었으며 글씨는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선생께서 썼다. 사적비는 1974년 10월 완성되었다. 사적비에 적힌 내용으로 강감찬 장군의 위업을 대신 소개한다.
낙성대 공원의 강감찬 장군 기마상
[한국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 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 고려 정종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태조의 건국 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때는 바야흐로 중원대륙 동몽고 지대에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 시대이었다. 거란군이 성종 12년 서기993년에 처음 침구해 왔을 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써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 뒤 현종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다시 4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므로 고려에서도 강조 장군이 30만명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때에 그의 나이 64세였다. 현종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에 재상을 겸한 채 서경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섯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명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부터 의주까지에 20만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 막았다가 적들이 오자 갑자기 물을 터서 적군을 크게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 다시 다른 길로 송경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쫓겨나며 귀성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었다. 때는 3월 곳은 귀성의 동쪽 들판 그날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말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 병기들조차 수없이 노획하니 이야말로 고려 일대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 지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 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2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 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 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런 공신호를 내려 주었다. 장군은 73세로 조정에서 물러나 성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은거하며 낙도 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했으며 현종 22년 서기 1031년 8월에 세상을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9백여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한다.]
그런데 낙성대의 유래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서 약간 아쉬웠다. 그리고 글씨를 쓸 때에 칸을 띠지 않고 적었기 때문에 촘촘해서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래 비석에는 띠어쓰기를 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아무리 노산 선생님의 문장이지만 조금 어색한 표현도 더러 있었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토씨를 많이 생략한 것도 읽는데 부담을 주는 것이었다.
내삼문에서 바라본 안국사 내정
장군이 태어날 때에 봉천동 집에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낙성대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에 대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어느날 밤 중국의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수소문하여 그 자리를 찾아갔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 아기가 강감찬이다. 뒤에 송나라 사신이 우정 다시 찾아와서 소년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임을 확인했다는 내용이다. 마치 동방박사와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강감찬 장군의 일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사실은 사적비에 적힌 내용대로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의 백성들은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장군이 태어난 집터에 3층 석탑을 세웠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석탑도 훼손되었으나 서울시가 1964년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였다. 원래 이 석탑은 현재의 봉천동 218번지에 있었다. 그러다가 새로 낙성대를 조성하고 석탑을 이전했다. 현재 낙성대의 주소는 봉천동 228번지이다.
낙성대에 안국사를 조성하게 된 배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가 컸다. 박대통령은 서울시장에게 낙성대를 조성하라고 지시하면서 낙성대라는 친필 휘호를 보내주었다. 박대통령의 친필 휘호는 돌에 새겨 안국사 입구에 세워 놓았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는 명필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주 올곧고 반듯한 글씨이다. 장군의 영정을 모신 안국사 본건물까지 가려면 안국문을 지나 내삼문(內三門)을 거쳐 올라가야 한다. 내삼문은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문안에 홍살문을 세워 놓은 것이다. 내삼문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이른바 두리기둥(원기둥)이어서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넓은 경내는 한적하여 일부러라도 산책삼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안국문을 지나면 넓은 내정(안뜰)이 나온다. 여기에 석탑과 사적비가 마주보고 서 있다. 안국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외원에는 연못에 분수를 마련하여 경관을 더해주고 있다. 낙성대 광장에는 강감찬 장군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어서 장군의 우국충정을 새삼 느끼게 해주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 기념비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몇가지 에피소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선 장군이 태어나게 된 사연에 대한 전설이다. 장군의 아버지는 나이가 지긋하여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 부처님에게 기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 이제는 집에 돌아가서 부인과 합방하면 아들을 얻을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장군의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만하여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절세미인을 만나게 되었고 밤도 늦었으므로 그 여인의 집에서 하루밤을 유하게 되었다. 그 절세미인은 실은 여우였다. 다음날 장군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 부인과 합방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얼마후 장군의 아버지가 밤중에 우연히 만난 여인이 궁금하여 찾아갔더니 그 여인은 어느새 잉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달 후에 강감찬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설화이므로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이같은 출생담은 흔히 나라의 시조(始祖)나 위인이 태어날 때 거론되는 출생설화와 엇비슷하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안국사
장군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약관으로서 어떤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고을의 관속들은 신임 원님이 너무 어리다고 하여 은근히 경멸하였다. 이에 장군은 밭에 있는 수수대를 뽑아 관속들에게 소매에 넣어보라고 명령하였다. 관속들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청년원님은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넣지 못하는 위인들이 어찌하여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소매 속에 넣으려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후로부터 관속들은 청년원님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그가 서울 근교의 어떤 고을에 원님으로 부임하였을 때 남산에 사는 수백년 묵은 호랑이가 지나가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으며 앞으로는 새끼도 평생에 한 마리밖에 낳지 못하고 남산이 아닌 다른 산에서만 살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또 어떤 고을에서는 여름날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부적을 써서 연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후로는 개구리가 결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낙성대를 가려면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내려 4번출구로 나가 약 10분정도 관악산 쪽으로 걸어가면 나온다. 무료입장. 안국사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음식물 반입도 금지. 경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성대 정원의 분수
안국사로 올라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내삼문
강감찬 장군 사적비
석탑
안국사 입구의 안국문
안국문의 두리 기둥
안국문 안쪽에 설치된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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