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명동 국립극장의 추억

정준극 2009. 3. 18. 07:49

명동 국립극장의 추억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세워지기 전에 명동 한 가운데에 국립극장이 있었다. 명동 국립극장은 1960년대에 서울에서 음악회를 열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이화여대 강당에서도 음악회가 열렸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시설이 전문음악회장으로서 마땅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내켜서 가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추운 날씨에도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독창자들이 입을 호호 불며 노래를 불러야 했다. 명동 국립극장의 음악회에 처음 갔었던 것은 중학교 다닐 때였다. 학교에서 민초혜(閔初惠)의 바이올린 연주회를 단체로 갔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잘 하던지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그후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닐 때에는 별로 가지 못했다가 직장을 가진 이후로는 마침 사무실이 시청 앞에 있었기 때문에 저녁에 시간만 있으면 명동 국립극장의 음악회를 찾아갔다. 베이스 이인영(李仁榮)씨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맡았던 오페라 파우스트를 처음 본것도 명동 국립극장에서였고 박노경(朴魯慶), 이정희(李貞姬), 안형일(安亨一), 오현명(吳鉉明) 제씨의 4중창 연주회를 처음 본 것도 명동 국립극장에서였다. 명동 국립극장에 드나들었던 관계로 음악평론가들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에 음악평론을 하시던 분으로는 이성삼(李成三), 이상만(李相萬), 김형주(金亨柱), 유한철(柳漢澈), 박용구(朴容九), 이상구(李相龜)씨 등이 있었다. 작곡가 금수현씨가 월간음악을 창간하고 평론의 대열에 참여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음악 애호가의 흉내를 내던 나는 올챙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분들과 만나 음악회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일생의 영광이었다.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이 끝난후 이분들과 함께 중앙극장 옆의 평래옥에 가서 평양냉면도 먹고 내친김에 소주들도 한잔씩 하던 일도 더러 있었다. 이성삼씨는 이북 출신이라서 더구나 냉면을 좋아하였다. 술에 약하디 약한 나는 소주 두어잔을 받아 마신 것이 죄가 되어 평래옥에서 나와 서로 인사를 한후 집으로 간다는 것이 중앙극장 앞 길가의 구루마에 쓰러져 잠들었던 일도 있다. 한참후 새벽만해서 깨어나 시청 앞의 사무실을 찾아가 숙직실 신세를 졌던 일도 있다. 강석희씨와는 무교동 한밭식당에서 가끔 만났다. 당시 무교동 한밭식당은 깍두기가 유명해서 점심시간에 일부러들 갔었다. 관철동인가에는 곰탕으로 유명한 하동관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자주 갔었다. 얼마전 보니 그 하동관이 명동 국립극장에서 가까운 구내무부 자리 옆 골목으로 와 있었다. 옛날 명성 때문인지 그래도 사람들이 많았다. 내친 김에 옛날 국립극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둘러보니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새단장을 한 후에는 명동예술극장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Myong Dong Theater라고 적어 놓았다. 아마 연극도 하고 음악회도 다시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2009년 5월 개관 예정이라고 한다. 명동 국립극장은 나의 일생에 변화를 가져다준 중요한 장소였다. 그 얘기는 다음번에 하기로 하자. 

 

2009년 9월의 명동예술극장


구 미도파 길 건너편으로 펼쳐 있는 명동 길로 들어서면 유네스코 건물이 있었고 조금 지나서 명동극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최대의 행사였으므로 지금 플라자호텔 뒤편에 있었던 경남극장과 명동초입의 명동극장에도 자주 갔었다. 나탈리 우드와 워렌 비티가 주연한 ‘초원의 빛’을 본 것도 명동극장에서였다. 명동극장은 국악인 황병기(黃秉冀)씨와 관련이 있는 곳이어서 간혹 그분의 후의로 미술평론가 이구열(李龜烈)씨와 함께 한두번 무상출입했던 일도 있다. 극장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당시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 외에는 딱히 오락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라도 여유가 있으면 극장 문 앞을 서성거렸다. 가장 자주 갔었던 곳은 서대문 농협 자리에 있었던 유서 깊은 동양극장, 을지로 6가의 계림극장, 신당동의 동화극장, 왕십리의 광무극장, 종로5가의 평화극장, 남영동의 성남극장, 그리고 플라자호텔 뒤편에 있었던 경남극장이다. 이런 극장들에서는 주로 2본 동시상영이어서 아침에 들어가면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나올수 있었다. 개봉관인 단성사, 피카딜리, 수도(스카라), 명보, 국도, 대한, 국제극장 등은 입장료가 비싸서 감히 두리번거리기도 어려웠다. 국도에서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를 보았다. 로버트 테일러와 에바 가드너 주연의 ‘원탁의 기사’였다. 며칠후 수도에서 리챠드 버튼과 진 시몬즈 주연의 ‘성의’가 역시 시네마스코프로 상영되어 놀라게 했다. 시네마스코프를 처음 볼 때 ‘화면이 저렇게 클수가 있나?’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영화 '남태평양'에서 넬리 역의 밋지 게이너와 에밀 드 베크 역의 로싸노 브라찌. 우리나라에서 70 mm 영화는 한때 스크린이 넓은 대한극장에서만 상영 가능했다.

 

70mm는 대한극장에서만 상영이 가능하다고 했다. 진짜로 대한에서 70mm의 ‘남태평양’을 보았을 때 화면이 너무 커서 놀란 일이 있다. 변두리라도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서대문의 동양에서 타이론 파워와 모린 오하라가 주연한 ‘웨스트포인트’(원제목은 Long Grey Line)를 무척 감명 깊게 보았다. 피카딜리에서 007 첫 작품인 From Russia with Love를 보기위해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섰던 기억이 난다. 숀 코네리에 의한 007이 장안의 화제가 되자 어느덧 대학생들은 영화에서 볼수 있었던 007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상식이었다. 을지로 2가 쪽에 있던 어떤 극장(아카데미?)에서 최초의 무협영화인  ‘방랑의 검객’이 상영되었을 때는 표를 구하느라고 난리도 아니었다. 당시 경향신문에 무협소설이 연재되어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있었는데 진짜로 중국말을 하며 장풍을 쓰는 무협영화가 들어오자 온통 난리도 아니었다. 중국 영화였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자장면집 주인들도 많이 왔다. 특히 구정에 즈음해서 개봉되었기 때문에 플라자 호텔 뒤편 골목 길의 만두집 주인까지 모두 왔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후로 별의 별 중국 무협영화가 마치 봇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대만배우인 왕우(王羽)와 날렵한 여배우인 쩐페이페이(鄭佩佩)는 신성일과 엄앵란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007을 볼 것인지 장풍을 볼 것인지를 물으면 대부분 장풍을 선택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장풍무협이 너무 허풍이 세어서 대부분 식상했다. 

 


일제시대 영화관(시네마 하우스)이었던 명치좌. 건물 정면 2층에 明治座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미도파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다. 그 이전에 서울의 백화점으로는 종로 네거리의 화신이 유일했다. 화신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신기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으면 일부러 화신백화점까지 가서 기쁜 마음으로 두어번 타고 나왔다. 그러나 자주 계속 탈수는 없었다. 백화점 직원이 학생들은 무조건 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미도파에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다. 사람들은 움직이는 계단이 너무 신기해서 그걸 타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미도파는 이름부터가 동화백화점이나 화신백화점처럼 한국 스타일이 아니고 서구적이어서 인기가 많았다. 수복이 된 후에 동화백화점은 미군들의 PX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은 얼씬도 할수 없었다. 몇 년후 동화백화점은 신세계로 새롭게 태어났다. 비록 미도파처럼 에스컬레이터는 없었지만 미군 PX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평소 겉으로만 구경하다가 실제로 안에 들어가 볼수 있게 되어 사람들이 몰렸다.

 

한때 금융기관이 사무실로 사용. 어, 명치좌라는 글씨는 지워버렸네.

 

명동의 진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나타났다. 당시에는 1년 내내 통행금지가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이브와 제야의 종을 울리는 섣달 그믐날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막말로 개나 소나 모두들 명동으로 몰려 나왔다. 사람들은 공연히 미도파 길 건너의 명동 입구에서부터 명동성당이 있는데 까지 왔다 갔다 걸어 다니며 성탄을 축하했다. 거리의 레코드가게와 빵가게에서는 길거리에 스피커를 내어 놓고 크리스마스 캐롤이나 팝송을 연신 틀어댔다. 닐 세다카가 부른 ‘오 캐롤’은 대단한 인기였다. '오 캐롤 아임 벗어 풀'을 '오 캐롤 아임 빠다빵'이라며 불렀다. 빠다빵이 먹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이라도 오면 난리도 아니었다.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가만히 서 있어도 인파에 떠밀려 평면 에스컬레이터처럼 움직일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에 가서 서성거리지 못했던 사람은 다음날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하여 친구들과 얘기하는데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미도파에서 명동으로 건너가려면 지하도를 이용해야했다. 당시 시청 앞과 광화문 덕수제과 앞 등 시내 몇 곳에 육교는 있었지만 지하도는 남대문 지하도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차에 미도파 앞에 지하도가 생기자 이곳을 통해서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건너가는 것도 하나의 데이트 코스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지하도에는 밤늦게 아베크족들을 대상으로 스냅 사진을 찍는 사진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나가는 아베크족들을 보면 공연히 플래쉬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주며 장사를 했다. 남학생과 함께 미도파 앞 지하도를 건너가다가 사진사들이 카메라를 들이 댈것 같으면 여자들은 대개 얼굴을 손으로 가리느라고 바빴다. 혹시 남학생과 데이트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혀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면 곤란해서였다. 그때만해도 미팅이라는 것이 유행하지 않아서 남녀대학생들이 서로 만나서 데이트하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미도파 앞과 명동 입구는 지나가는 숙녀들의 옷깃을 잡고 돈을 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 거지들이 많았다. 돈이 없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참동안이나 쫓아오는 바람에 혼이 난 여대생들이 많았다. 모두 못 살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명동예술극장 조감도. 200억짜리 공사. 이 돈은 어디서 생겼나? 역시 국민의 혈세. 명동예술극장 공사하면서 관계 공무원들만 신났겠다.

 

'발길 따라, 추억 따라 > 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찰박물관   (0) 2009.04.20
낙성대(落星垈)  (0) 2009.03.23
약현(藥峴)성당  (0) 2009.03.16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0) 2009.03.12
북촌의 박물관들  (0) 2009.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