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약현(藥峴)성당

정준극 2009. 3. 16. 22:41

약현(藥峴)성당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것은 부동산과 교회라고! 과연 그런것 같다. 어디가나 부동산 천지이다. 교회는 더 많은 것 같다. 언젠가 밤중에 독일에서 온 손님과 함께 대전을 떠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하남을 지나게 되었다. 빨간 네온사인의 십자가들이 마치 밤바다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작은 배들처럼 보였다. 손님이 나에게 물었다. 웬 십자가가 저렇게 많으냐고! 모두 교회라고 설명해 주었다. 손님은 웬 교회가 저렇게 많으냐고 다시 물었다. 이 땅엔 친북좌파를 비롯한 공공의 적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정말 교회가 많다. 정말 죄인들이 너무 많아서 교회가 자꾸 생기는 것 같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이땅에 오셨고 교회는 그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한편,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숫자적으로도 많지만 규모면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규모에서 세계10대 교회가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익산 신광교회 등등. 정말 대단한 우리나라이다. 교회건물들의 모습은 작으나 크나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뾰족한 첨탑 위에 십자가를 세워 놓은 것이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본받으려는 노력이다. 고딕양식의 특징은 하늘 높이 올라간 첨탑이다. 쾰른대성당, 비엔나의 슈테판대성당, 바르셀로나의 성가족대성당 등등 모두 하늘 높이 올라간 첨탑을 자랑하고 있다. 되도록 천국과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십자가의 길 

 

각설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식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명동성당? 아니올시다. 정동교회? 아니올시다. 서울 중구 중림동에 있는 약현성당이다. 중림동에 있기 때문에 중림동성당이라고도 부른다. 약현성당은 일찍이 1892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2009년으로 무려 117주년을 기록한다. 서양식 교회 제2위인 인천 답동성당은 약현성당보다 4년 후인 1896년에 세워졌고 제3위인 명동성당(鐘峴성당)은 1898년에 세워졌다. 1898년에는 정동(貞洞)교회의 서양식 벽돌 건물도 완공되었다. 정동교회는 1887년에 시작되었지만 현재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제대로의 벽돌건물은 1898년에 완공되었다. 새문안교회도 1887년에 설립되었지만 상당기간동안 한옥에서 예배를 보았고 서양식 벽돌건물은 그보다 훨씬 후인 1910년에 완성되었다. 천주교성당으로서 약현, 답동, 종현(명동)에 이어 네 번째로 세워진 고딕식 건물은 1902년 대구 계산성당이다. 이렇듯 약현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완성된 서양식 벽돌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더러는 약현성당이란 것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른다.

 

 중앙제단과 스테인드글라스

 

약현성당은 남대문 쪽에서 염천교를 건너오다가 보면 중림동 언덕에 있다. 부근에 비슷한 뾰족탑의 중림교회가 있어서 혼돈할 수도 있지만 약현성당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 성당건물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예전부터 성당의 부지가 넓어서 여러 관련 건물들이 한 울타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랜 전통의 가명유치원이 있고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이 있다. 가톨릭출판사도 있으며 서소문 순교자기념관도 있다. 순교자기념관은 결혼식 피로연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순교자기념관 안에는 한국식 사랑방의 분위기를 연출한 폐백실까지 있다. 아무튼 천주교 약현성당은 중림동의 금싸라기 땅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약현이라는 말은 옛날에 중림동에서 만리재로 넘어가는 일대에 약초밭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에 대하여는 한마디 더 거들지 않을수 없다. 1784년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이래 수많은 신도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 짐작컨대 1만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였다. 주로 서울에 있던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현재 약현성당이 있는 서소문 밖의 장소에서도 1백여명이라는 신도들이 순교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버리는 고귀한 정신! 1백여명의 순교자들 중에서 44명이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천주교 2백주년 기념으로 서소문 밖 약현성당 올라가는 길에 순교기념탑을 세웠다. 기념 조형물에는 여러 장면이 돋움 조각되었지만 가운데에 있는 장면이 특히 눈길을 끈다. 어떤 부인이 바야흐로 망나니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인의 모습은 평화스럽다. 신앙의 놀라운 승리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약현성당의 아담한 모습


나는 만리동에 몇년동안 살았었고 지금도 만리동2가에 있는 만리현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이웃인 중림동의 약현성당은 먼발치에서나 보았지 한번도 들어가본 일이 없다. 그래서 반세기만에 모처럼 작정하고 약현성당을 찾아 올라갔다. 약현성당에 올라서면 복원하는 남대문의 모습이 보인다. 남대문과 약현성당은 이상한 유사점이 있다. 둘 다 어떤 정신 나간 부랑자가 밤에 몰래 기어들어가 불을 질러서 뼈대만 남기고 불타 버렸다는 점이다. 남대문이 어떻게해서 잿더미가 되었는지는 모두 잘 아는 내용이므로 생략하고 대신 약현성당이 잿더미가 된 사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때는 1998년 2월 11일 제법 쌀쌀한 밤이었다. 서울역을 떠돌던 어떤 부랑자가 중림동의 약현성당까지 올라와서 성당 안에 기어 들어가 커튼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자기 딴에는 추워서 불 좀 쬐기 위해 그랬다는 것이지만 말도 안되는 정신 나간 소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불자동차들이 동원되어 진화했지만 어쨌든 뼈대만 남기고 거의 다 타버렸다.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식 서양건물이므로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 252호이다. 약현성당에 불이 나자 알 만한 사람들은 발을 약간 동동 구르며 귀중한 사적이 불에 탄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재는 완전히 복원되어 있다. 사적(史蹟)이란 것은 원형대로 남아 있어야 사적으로서 가치가 있는 법인데 현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 새로 지어놓은 건물에 대하여도 사적이라고 볼수 있는 것인가? 옛날 벽돌이 아니고 요즘 구워낸 벽돌인데! 그런 문제는 역사학자들이 결정할 것이므로 일단 중지.

 

 본당 주보성인 성요셉

 

약현성당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1892년에 완공되었다. 고종이 친정을 펴기 시작한지 2년째의 일이었다. 그해에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천주교의 활동이 용이하게 되자 프랑스 신부인 코스트라는 분이 직접 설계하고 공사감독을 하여 완성했다. 재미난 사실은 시공자들이 한국인들이 아니라 중국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건축자재는 한국에서 제공했으므로 약현성당은 말하자면 한-불-중 3개국 합작인 셈이다. 약현성당은 성요셉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그래서 성당 뒤편에 ‘본당주보성인 성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석상이 있다. 가톨릭출판사 아래쪽에는 성가족 동굴이 마련되어 있다.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요셉을 도와 목수 일을 하는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가톨릭출판사 앞마당에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의 석상, 그리고 피에타(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성모가 안고 있는 모습) 석상이 있어서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런데 모두 추상조각이어서 한편으로는 약간 해학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약현성당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는 14처의 돌조각들이 차례대로 세워져 있는 십자가의 길이 있어서 지나갈 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모든 성당들이 성당 안에 14처를 표시하고 있는데 약현성당 안의 14처는 조각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중앙제단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화려한 것도 알아 준다. 결론적으로 약현성당은 역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므로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방문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성당 뒤편에 있는 넓직한 쉼터의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한담을 나누어도 좋은 조용한 곳이다.  

 

 성당내부의 아름다운 기둥 건축

 성당 안 14처를 표시한 조각 중의 하나

십자가의 길 마지막 장소인 제14처

 나사렛 성가족 동굴

 서소문 순교자기념관

 성모와 아기예수 추상작품. 한국어머니와 한국 아기와 같은 인상이다.

 피에타(슬픔의 성모) 추상작품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

 가톨릭출판사의 단정한 창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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