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덕수궁의 비운

대한제국이 선포된 장소

정준극 2009. 3. 26. 14:02

대한제국이 선포된 장소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갔던 영친왕의 일시 귀국 기념. 왼쪽으로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종비인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고종과 민비는 경복궁의 건청궁에 살고 있었다. 1895년의 어느날 밤, 고종이 외출한 틈을 타서 일본 깡패(낭인)들과 일본 순경 나부랭이들이 건청궁으로 몰려와 민비를 무참하게 살해했다. 일본 놈들은 조선의 국모인 민비를 칼로 베어 죽인후 건청궁 뒷동산인 녹산에서 시신을 불에 태워 없앴다. 힘없는 고종은 일본 놈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아무런 사법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오히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왕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참으로 한심하게도 러시아공사관에서 1년 이상을 지낸 고종은 날마다 러시아 빵을 얻어먹는 것도 눈치가 보여 1897년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뜻한바 있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였다. 이와 함께 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이므로 좀 넓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주변을 크게 확장했다. 이렇게 쓰다 보니 마치 근대조선의 역사를 강의하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다. 그러나 나중에 덕수궁의 이모저모를 설명할 때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그간의 과정 등 배경설명이 필요하지 않을수 없다. 부디 독자제위께서는 이 점을 양해하시어 좀 지루하다고 느끼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추석날이어서 사람들이 많았다. 중화전. 2009년.

 

일제(日帝)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경운궁에 돌아와서 당장 한 일이라는 것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을 쌓아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것이자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일제는 어서 속히 조선왕조를 마무리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싶었다. 일제는 엉뚱한 행동을 하는 고종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차에 1904년 4월, 고종의 거처인 함녕전(咸寧殿)에서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났다. 경운궁은 거의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당시 일본측 신문은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한 후 말리는 과정에서 온돌이 과열하여 나무 기둥에 불이 옮겨 붙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온돌이 과열되었다고 해도 온돌의 구조상 불이 번지고 밖에 있는 기둥에까지 옮겨 붙을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함녕전의 온돌과열이라면 함녕전 하나만으로도 족한데 멀리 있는 다른 건물까지 불바다가 되었다는 점도 납득키 어려운 것이다. 일제의 못된 장난임에 틀림없다. 당시에는 소방시설이라는 것이 극히 빈약했다. 더구나 궁궐 안에는 작은 문과 담장들이 많아서 빨리 달려가 불을 끄고 싶어도 길이 막히기가 십상이었다. 물론 요즘과 같은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건물들은 모두 목재가 아니던가! 가장 큰 건물인 중화전 주위에는 소방시설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었다. 드므라는 것이다. 일종의 커다란 솥이다. 그 안에 물을 부어놓았다. 그러나 드므에 부어넣은 물은 소방용이 아니다. 화마가 덕수궁을 방문했다가 심심하던 차에 드므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보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고 ‘아니, 이게 누구야? 왜 이렇게 못생겼어?’라면서 깜짝 놀라 도망가도록 하여 화재를 예방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세상에 미신도 이런 미신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마를 상대로 고도의 심리전을 준비한 것이어서 조상의 지혜에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어쨌든 경운궁에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지만 고종은 화를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히 갈 곳도 없고 해서 건물들을 복원하여 그대로 살기로 했다.

 

어, 중화전 지붕의 잡상이 이번에는 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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