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덕수궁의 비운

고종이 승하한 장소

정준극 2009. 3. 26. 14:09

고종이 승하한 장소

 

 대한문을 떠나는 고종의 상여

 

헤이그사건이 터지자 일제는 고종을 현역에서 사라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일제는 고종을 별의별 수단으로 압박하여 어벌벌한 순종에게 양위토록 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필자는 사진으로 남아 있는 순종이란 사람의 모습을 보면 자꾸 좀 모자란 사람처럼 생각된다. 순종의 어머니는 세상에서도 그만큼 총명한 여인이 없을 지경인 명성황후였는데...그 아들인 순종은 '저런 사람이 어찌 대한제국의 황제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글쎄! 생긴 것은 어벌벌해도 머리는 좋아서 공부를 많이 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도무지 미덥게 생기지 않은 사람이 순종이다. 그런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가 되었다. 순종의 첫 번째 업적은 아버지 고종이 거처하시는 경운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로부터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이후 일제는 덕수궁을 축소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고 1919년 고종이 끝내 요단강을 건너자  덕수궁의 대부분 건물들을 없애고 일반 공원으로 만들었으며 아울러 덕수궁의 땅과 건물들을 공매하여 부호 기업가들에게 팔아 넘겼다. 예를 들면 중명전과 선원전(璿源殿) 일대를 매각한 것이다. 이로써 궁역(宮域)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편, 일제는 고종이 살아 있을 때 겉으로나마 고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덕수궁에 석조전을 짓고 석조전 앞에 분수를 조성하여 전통의 코리아 궁궐을 서양식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실은 조선의 궁궐을 개조하여 백성들이 미련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처사였다. 유명한 석조전은 1900년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10년후인 1910년에 완성했다.

 

석조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덕수궁은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해방 후 덕수궁은 미소공동관리위원회의 회담장소로 사용되었다. 사변을 거치면서 덕수궁은 다시 피폐해졌다. 궁궐 건물의 목재를 땔감으로 뜯어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우여곡절 끝에 친북좌파의 김아무개-노아무개 정권이 지나가고 2007년 말에 이르렀다. 정부는 덕수궁 복원을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2009년 3월 현재 함녕전 앞의 행랑들을 보수하고 있다. 이상이 덕수궁의 약사였다.

 

 고종 승하시 우는 역할을 맡은 곡전담반이 함녕전 앞에서 굴건제복을 입고 엎드려 아이고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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