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경궁의 영욕

50년대의 추억

정준극 2009. 3. 29. 23:08

50년대의 추억


당시 창경원에 가려면 을지로4가에서 출발하여 돈암동까지 가는 전차를 타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다. 을지로4가 종점을 출발한 전차는 종로4가를 거처 창경원 바로 앞을 통과한후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돈암동의 어떤 제과점 앞까지 갔다. 사람들은 창경원에 가는 전차를 타기 위해 아침부터 을지로4가에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중간 정류장에서는 아예 전차에 올라탈 여지가 없기 때문에 좀 힘이 들더라도 을지로4가 종점으로 몰려갔다. 모처럼 창경원에 가려면 우선 교통전쟁부터 겪어야 했다. 겨우 창경원 앞에 도착하면 입구는 벌써 인산인해였다.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야, 아무개 왔냐? 워딨냐?’라면서 서로 자기 일행들을 확인하느라고 소리치는 것이 마치 흥남부두와 같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것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것이 아니던가? 뿐만 아니라 솜사탕 파는 사람들, 황설탕을 녹여 만든 또 뽑기 파는 사람들, 바람개비 파는 사람들, 인절미나 김밥을 파는 사람들 등등 때문에 아무튼 창경원 앞은 전차길 건너까지도 시장바닥이었다. 모두들 먹고 살자고 그러는데 뭐라고 할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하도 많다보니 입장권 사는 데만 해도 시간이 무진장 걸렸다.

 

1950년대 말 3월의 창경원(당시) 앞은 이랬었다. 그야말로 창경원 구경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아마 1959년 3월 26일 이승만대통령 생신축하로 창경원 입장이 무료여서 이처럼 혼란했던것 같다. 인파로 옴짝 달싹 못하는 전차가 보인다. (Credit)


겨우 입장해서 자리를 잡고나면 아이들은 우선 원숭이를 보러가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파 때문에 원숭이나 코끼리는 먼발치에서나마 잠시 볼수 있었다. 건너편의 칸막이 우리에 들어 있다는 뱀도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안이 컴컴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어디 있는지 알수 없기 때문이었다. 춘당지의 수정궁 쪽에는 케이블카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십리만큼 늘어서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려면 아마 한나절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야 징징대지만 일찌감치 포기하는 가족들도 많았다. 보트를 타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버드나무가 휘어진 아래로 파라솔을 받쳐든 여인을 태우고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보트를 타는 것이 아니라 간신히 보트를 빌려 타고나면 보트를 빌려 탄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좁은 연못에서 서로 이리 저리 부딪치다가 어느덧 시간이 되어 보트를 반납해야 했다. 영락없는 전쟁이었다. 땡볕에 창경원에서 사람들에 치여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보면 머리에 뒤집어쓰는 것은 온통 먼지뿐이었고 귀에 들리는 것은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는 다는 구내방송 뿐이었다. 봄철에 창경원 나들이가 아니라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을 정도였다.

 

 

창경원 동물원있던 자리. 새장. 

 

하기야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온 부모들은 사람에 치이고 먼지에 묻혀서 오후쯤만 해서는 파김치가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모처럼의 나들이에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녔으니 아이들 간수하는 것만해도 큰 일이었다. 아무튼 사람들에 치어 다니는 통에 구내방송에서는 쉴 틈 없이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스피커의 울림이 행락객들의 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에는 ‘어제 창경원에서 미아 몇 명 발생’이라는 뉴스가 반드시 나왔다. 창경원이 제 아무리 넓다 한들 원남동의 한 부분일 뿐인데 그렇게 많은 미아가 발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건이었다. 오후의 귀경길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차를 타려고 기다리다가 지친 나머지 그 먼 길을 걸어서 가느라고 밤중만 해서 집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집에 와서 보니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집이 창경원 옆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원서동이나 원남동에 살고 있다고 하면 마치 대궐안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부러워했다. 이미 60대가 지난 사람들의 창경원에 대한 추억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밤벚꽃 놀이에 나온 사람들. 그래도 평생 한번의 밤나들이이므로 되도록이면 차려 입었다. 가정부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한복을 입었다. (Credit)


그 창경원이 요즘 몰라보게 변했다. 우선 창경원이라는 명칭은 옛날 일기장에서나 찾아볼수 있게 되었다. 1983년부터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며칠전에 우정 찾아가 보았더니 관람객들도 많지 않았다. 불경기에 모두 바빠서 창경궁의 벚꽃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같다. 다른데 갈 곳도 많이 생겼기 때문에 굳이 창경원까지 가서 벚꽃 구경을 할 필요가 없게 된것 같았다. 더구나 그 유명한 창경원의 벚나무들이 많이 사라졌다. 사쿠라라고 하면 자꾸 일본이 생각나서 일부러 벚나무들을 뽑아버린 것 같다. 대신, 토종 소나무나 괴나무(회화나무)들이 주인이 되었다. 하기야 사쿠라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창경궁이 다른 궁궐에 비하여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역세권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복궁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바로이다. 창경궁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리면 거기가 거기다. 덕수궁은 시청앞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교통편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창경궁은 어떠한가?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혜화역에서 내려 동숭동고개를 넘거나 서울대학교 병원을 거쳐 한참 걸어가야 나온다. 그렇게 해서 창경궁을 찾아오는 외국관광객들을 보면 참으로 우리 문화 유산을 사랑하는 훌륭한 백성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창경궁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사실은 무척 재미있다.

 

 

매화만발한 명정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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