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경궁의 영욕

일제가 훼손한 창경궁

정준극 2009. 3. 29. 23:10

일제가 훼손한 창경궁


원래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세우고 세종이 태종을 위해 현 창경궁 자리에 수강궁을 세운 것도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당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현재의 경복궁 자리와 창덕궁 자리가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했다. 한양에서 최고의 길지(吉地)라는 것이었다. 세종은 1418년 즉위하고 나서 상왕인 태종 이방원이 편하게 지내도록 궁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세종은 새 궁궐을 지을 터를 찾다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옛 고려의 이궁 터인 현재의 창경궁 자리가 명당(吉地)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더구나 태종이 세운 창덕궁과 바짝 붙어 있지 않는가? 세종은 다른데 볼 것 없이 명당자리라고 하는 현재의 창경궁 자리에 태종을 위한 궁궐을 짓고 태종의 만수무강을 바란다는 뜻에서 수강궁(壽康宮)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흘러 성종의 시대가 되었다.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때에는 대비가 세 명이나 있었다. 세분의 대비를 모두 창덕궁에서 모시자니 창덕궁이 비좁았다. 성종은 수강궁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세분의 대비를 함께 살도록 했다. 창경궁이라는 이름은 성종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세월이 또 흘러 임진왜란이 터졌다.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모두 불에 탔다. 왜놈들은 방화(放火)에 도사들이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이 거의 끝날 때쯤해서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완전히 불타버린 경복궁에서 지낼수가 없어서 현재의 덕수궁에서 잠시 지내다가 그나마 완전히 불에 타지 않은 창경궁을 급히 수리하여 거처로 삼았다. 그때로부터 창경궁이 조선의 정궁(正宮) 역할을 하면서 옆에 있는 창덕궁은 이궁(또는 別宮)이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으로부터 영조, 정조, 순조에 이르기까지 창경궁은 사실상의 정궁으로서 훗날 장희빈, 인현왕후 등 TV사극의 무대가 되었다. 창경궁에 대하여 기억할 점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곳이 창경궁이었으며 대장금이 활동했던 곳도 창경궁이라는 것이다.

 

 일제는 명정전 앞 조정의 박석들을 모두 뜯어냈다. 현재의 판석들과 품계석들은 나중에 설치한 것이다.


창경궁이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나서부터였다. 일제는 조선의 궁궐들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조선왕은 왕이 아니라 일본 천황의 신하이므로 그렇게 좋은 궁궐에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다른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을 이모저모로 훼손하면 왕실의 존엄성이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임금 알기를 우습게 알기 시작할 것이므로 일본으로서 그점을 이용하여 식민지 정책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했던것 같다. 이유야 어쨌든 악랄하고 간악한 일본 놈들은 창덕궁에도 불을 내고 덕수궁에도 불을 냈다. 그리고 불탄 창덕궁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일부 경복궁의 전각들을 허물어 창덕궁으로 이전하였다.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건물들이다.


창경궁에 대하여는 어떤 방식을 사용했을까? 간단히 말해서 창경궁의 많은 전각들을 허물고 대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궁궐을 공원으로 만들고 누구나 들어올수 있게 했다. 그리고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격하했다.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원래부터 담장이란 것이 없었다. 그래서 흉허물 없이 왕래하였는데 일제는 창경궁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창덕궁과의 경계에 담장을 쌓았다. 원숭이가 도망 갈까봐 담장을 쌓았나? 일제는 또한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큰 길을 만들어 궁궐과 종묘의 맥을 끊어 놓았다. 일제 시대에 창경궁은 일본 고관들의 연회 장소였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에서 연회를 자주 열었다. 일제는 명정전 조정(朝廷)에 있는 박석(薄石)들이 보기 좋지 않다고 해서 모두 들어내고 그 자리에 꽃밭을 만들었다. 주로 목련꽃을 심었다. 현재의 조정과 박석들과 품계석등은 해방후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명정전은 현존하는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지만(1616 광해군시절) 조정의 박석들과 품계석들, 어도(御道)가 있는 삼도(三道)와 답도(踏道)는 모두 현대작품이다. 새로 만든 조정이므로 다른 궁궐처럼 하다못해 차일고리와 같은 것도 바닥에 없다.


'오궁 일화 > 창경궁의 영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일한 국보 명정전  (0) 2009.03.29
5백년을 지켜본 옥천교  (0) 2009.03.29
창경궁의 수문장 홍화문   (0) 2009.03.29
역사 드라마의 무대 창경궁  (0) 2009.03.29
50년대의 추억   (0) 2009.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