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경궁의 영욕

유일한 국보 명정전

정준극 2009. 3. 29. 23:12

창경궁의 유일한 국보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은 창경궁에서 유일한 국보이다. 국보 226호이다. 그만큼 고참건물이다. 성종 때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인 1616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형님이 된다. 창경궁은 원래 정전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성종이 대비들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 수강궁 자리에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명정전의 용도도 궁궐의 정전으로서 즉위식, 외국 사절 접견,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등을 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파티를 여는데 사용했다. 파티가 잦아서인지 창경궁에는 수라간 등 주방들이 많았고 염고(장독대)의 규모도 상당했다고 한다. 음식준비를 위해서 우물들이 많은 것도 이해가 된다. 환경전 옆 공터에는 내의원을 비롯한 여러 지원부서가 있었다고 한다. 창경궁의 내의원은 특별히 유명했다. 나중에도 얘기하겠지만 대장금도 이곳 내의원에서 활동했다. 연회가 자주 열리다보니 배탈 및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내의원의 역할이 활발했던 것 같다.

 

 명정전 안의 닫집과 천정의 쌍봉황

 명정전 답도의 쌍봉 조각

 

식중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9년만에 돌아왔다. 이때 백성들은 지금의 마포부근인 양철평이라는 곳에서부터 홍화문 앞까지 길을 가득 메우고 반갑고도 서러운 심정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는 청국에 머무는 동안 서양의 발전된 문물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장차 조선을 새롭게 개화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귀국한지 두달만에 갑자기 몸이 아파 병석에 눕게 되었고 사흘만에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사망당시 몸이 흑색으로 변해 있었고 뱃속으로부터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저녁밥을 먹고 난후부터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고 한다. 그러므로 누가 음식에 독을 집어 넣었던것 같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반청반혁(反淸反革)의 기세가 있었다. 소현세자에 의한 친청개화(親淸開花)를 반대하는 수구 무리들이 독살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지만 그놈의 물증이 없어서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았다.

 

명정전에 연결된 회랑(예전에는 각 관서의 사무실이 있었다.)

 

다시 연회 얘기로 돌아가면, 13살에 임금이 된 성종은 어린아이가 무얼 알까마는 그래도 어른 공양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인지 세조비인 할머니 정화왕후, 예종비인 숙모 인순왕후, 어머니인 소혜왕후의 세분 대비들을 극진하게 모셨다. 뿐만 아니라 형이지만 자기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한 월산대군에 대하여도 정성을 다했다. 성종은 효도를 다하는 방편의 하나로 때만 되면 생일잔치, 경로잔치 등을 떡 벌어지게 차려드렸다. 주로 명정전에서 차려 드렸다. 그러므로 명정전 앞뜰(조정)에서는 깽깽 쿵덕쿵하는 풍악소리가 자주 들렸다. 그나저나 성군이라는 성종은 금반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는 말을 알고 있지 못한가?

 

명정문을 통해 본 명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