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경희궁의 아침

일제가 파괴한 역사의 현장

정준극 2009. 4. 3. 23:41

일제가 파괴한 역사의 현장

동궐에 견줄만한 대궐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의 5궁 중에서 경희궁만이 유일하게 아직까지는 무료입장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점심시간에 인근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줄줄이 산책을 하러 나온다. 대개 공무원들인것 같다. 신분증들을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반회사의 직원들은 아무리 점심시간이라고 해도 느긋하게 산책이나 다닐 처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거의 일률적으로 검은 양복을 입고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산책 나온 사람들은 공무원이기가 십상이다. 요즘엔 정부기관이던 어디던 여직원들의 퍼센트가 대단히 높다보니 점심시간에 커피 한잔 씩을 들고 경희궁을 산책하는 여자들이 많다. 공연히 이상한 얘기로 시간을 빼앗겼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경희궁 얘기로 돌아가자면, 경희궁은 광화문 네거리와 서대문 네거리 사이에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이웃이다. 지하철을 타고 찾아가려면 5호선을 이용하여 광화문에서 내려도 되고 서대문에서 내려도 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광화문에서 내리면 7번 출구로 나오는 것이 좋고 서대문에서 내리면 4번 출구로 나오는 것이 좋다는 것뿐이다. 경희궁은 다른 궁궐이나 마찬가지로 큰 길거리에 면하여 있다. 길거리에서 웅장한 흥화문이 보인다. 흥화문을 거쳐 조금 걸어가면 숭정문이 나오고 숭정문을 지나야 정전(정전)인 숭정전이 나온다. 숭정전 뒤편으로 편전인 자정전이 있고 그 옆으로 태령전이 있다. 이것이 전부이다. 왜 이것이 전부인가? 일제가 모두 허물었기 때문이다. 사연들이 많은 건물들이다. 일제가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를 현장학습하려면 궁궐 중에서 경희궁이 제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희궁은 국민 필견의 견학장소이다. 점심 잔뜩 먹고 나서 소화되라고 커피나 들고 산책이나 하는 장소가 아니다.

  

 숭정문. 단청이 화려하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합하여 동궐이라고 불렀다. 한양 도심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경희궁은 서궐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엄청난 규모였다. 동궐에 견줄만한 규모였다. 그토록 장대했던 경희궁이 일제의 간악한 정책으로 하나둘씩 건물이 허물어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모습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만일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었더라면 지금쯤 경복궁처럼 관광객들이 무수히 찾아올수 있었을 것이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완성했다. 1623년에 6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궁궐들이 거의 모두 잿더미가 되자 피난갔다가 돌아온 선조는 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렀다. 잘 아는대로 지금의 덕수궁은 애초부터 궁궐로 지은 것이 아니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사저(私邸)였다. 선조가 거처가 없어서 잠시 빌려 쓰자고 했을 때는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을 계속 정궁(법궁)으로 삼고 지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광해군은 창덕궁 복원을 서둘렀다. 창덕궁이 웬만큼 복원되자 광해군은 뒤도 안돌아보고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운궁(덕수궁)의 상당부분을 월산대군의 후손들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경운궁이라고 부르던 것도 격하시켜 서궁(西宮)이라고 부르게 했다. 그로부터 경운궁은 빈 궁궐로 남아 있게 되었으나 광해군은 공연히 빈 궁궐이 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여 활용방안을 강구한 것이 무엇이냐면 인현왕후를 서궁으로 유폐한 것이었다. 한편, 광해군은 집 짓는데 취미가 붙었는지 창덕궁의 별궁(이궁)으로 경희궁을 짓게 했다. 별궁은 글자 그대로 스페어 궁궐이다. 예를 들어 창덕궁에서 불이 나서 지낼수 없으면 임시로 와서 지내는 궁궐이다. 그렇게 하여 경희궁이 태어났던 것이다.


광해군은 반정으로 물러나고 인조가 새로운 임금이 되었다. 인조는 상당기간 동안 경희궁을 정궁으로 삼고 정사를 펼쳤다. 이후 효종으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으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 한창 때에는 경희궁에 1백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다. 현재 고대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서궐도(西闕圖)를 보면 경희궁의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코도 남는다. 그러다가 일제를 맞이하였다. 경희궁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0년 일제는 경희궁의 한쪽에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를 입주토록 했다. 그 때에 수많은 죄없는 전각들이 헐려 나갔다. 경성중학교 때문에 경희궁의 규모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었다. 그 이후에도 일제는 경희궁의 전각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등 경희궁 말살 캠페인을 벌였다. 예를 들면,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갔으며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曹溪寺)에 팔았다. 그래서 오리지널 숭정전은 동국대학교로 옮겨가서 정각원(正覺院)의 모습으로 남아 있고 현재 있는 숭정전은 새로 복원한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서 서울시 당국은 뜻한바 있어서 경희궁터를 발굴하고 경희궁의 전각들을 복원하는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부가 복원되지 2002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특히 철밥통 공무원들의 점심시간 산책 장소로 제공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