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이민사박물관

정준극 2009. 4. 29. 21:29

우리 민족의 애환이 얽혀있는 이민사박물관 

 

월미도의 해사고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 은하철도가 완성되면 박물관 앞에 정류장이 생겨서 찾아가기가 쉽게 된다.

 

원래 박물관이란 박물관은 모두 특별한 것이지만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민사박물관은 정말 특별한 것이다. 다만, 이런 훌륭한 박물관이 찾아가기가 어려운 너무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이 안스러웠지만 전시되어 있는 내용들은 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얘기를 전달해 주는 귀중한 것들이서 숙연함과 함께 이곳까지 찾아 왔다는 보람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나라의 이민사는 어려웠던 시기에 조국을 뒤로하고 만리이역으로 이민을 가야했던 한많은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이민이라는 것은 미주지역으로 새생활을 위해 떠난 것을 말하며 만주나 중국, 또는 일제 때에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어 갔던 것은 이민이라는 용어에 적합하지 않다.

 

대저 주제넘은 얘기인줄 알지만,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들었던 부모형제와 친구들, 그리고 어릴 때 뛰어놀던 고향산천과 조상님들의 뼈가 묻혀 있는 잊지 못할 곳을 뒤로하고 물설고 낯 설은 타국으로 건너가서 고생을 등에 업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오죽하면 고국을 떠나 이민의 길에 올랐겠는가? 모두들 찌들었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이민의 길에 올랐던 것이 아니던가? 타국에 가서 다른 민족들과 함께 살면서 그 얼마나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그럴 때마다 그 얼마나 고향산천과 부모형제에 대한 생각을 간절하게 했을까? 당장이라도 보따리 싸들고 다시 오고 싶은 생각들이 굴뚝같았을 것이며 밤마다 눈물로 지새던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참고 지낸 그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장소가 바로 이민사박물관이다.

 

첫 하와이 이민의 중심체가 되었던 인천 내리감리교회. 이 교회를 담임하였던 존스(조원시)목사의 도움이 컸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친척이나 일가 사람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또는 남미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민자가 많다는 뜻이다. 이민 1백여년에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은 7백만명이 넘고 있다. 대단한 숫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으로 처음 이민을 떠났던 때는 1902년이다. 102명이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바로 월미도에 있는 현재의 이민사박물관 앞에 모여서 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사박물관의 앞뜰에는 첫 이민자들이 떠났던 장소라는 표지가 세워져 있다. 인천시는 미주 이민 100주년이 되는 2002년에 월미도 한쪽에 이민사박물관을 건설했다. 당시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일꾼들이 부족해서 동양에서 사람들을 데려올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내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미국인 선교사 존스(趙元時)목사가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하와이로 떠나겠다는 사람들의 주선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첫 이민자 중에는 내리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있었고 인천과 강화 출신의 청년들이 많았다. 존스목사는 첫 이민자들을 인솔하고 하와이까지 동행했다. 존스목사는 우리말에 능숙했기 때문에 첫 이민자들에게 무척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고마운 분이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갤릭호 모델

 

갤릭(Gaelic)호라는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은 정해진 농장에서 주인이 만들어준 방고(번호표)를 하나씩 목에 걸고 지냈다. 예를 들어 인천에서 간 김기식은 2292라고 적힌 동그란 표찰을 달고 일했다. 말이 통하지 않던 당시 상황에서 오로지 ‘투투나인투’(2292)가 김기식의 신분이었다. 미국에서는 오래전에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근대판 노예와 다를바가 없이 지내야 했다. 흑인 노예들은 말이라도 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보라! 의지의 한국인들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끈기가 있었다. 이민 1세대들은 힘든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면서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지었고 교회를 건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금을 하여 보냈고 언젠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정신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훈련에 여념을 보이지 않았다.


1960년대가 되었어도 한국의 경제사정은 나아지지 못했다. 한국은 간호원들과 광부들을 독일로 보내게 되었다. 수출할 물건이 없으니 노동인력이라도 수출해야 했다. 얼마후 베를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에 있는 간호원-광부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조국이 가난해서...’라며 말끝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조국이 가난해서 여러분들이 고향과 가족을 떠나 이곳 타국에서 고생을 한다는 뜻이었다. 대통령이 눈물을 보이자 곧이어 집회장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간호원들과 광부들은 기숙사로 돌아가 밤새도록 소리를 죽이며 울었다고한다. 독일로 취업이민을 갔던 사람들은 계약이 끝나자 대부분 캐나다와 미국으로 재이민을 떠났다. 그에 대한 자료도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민사박물관에는 1960년대 중반에 멕시코와 남미로 농업이민을 떠난 이민자들에 대한 자료들도 정성껏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제4전시실까지 있다. 제1전시실은 ‘미지의 세계로’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민의 출발지였던 개항 당시의 인천을 소개하고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국내정세와 하와이의 상황을 살펴볼수 있다. 첫 이민자들을 태우고 하와이로 떠난 갤릭호의 모형을 통해 당시 이민자들의 길고도 험난했던 여정을 생생히 알아볼수 있는 전시실이다.


제2전시실은 ‘극복과 정착’이다.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의 애환과 이어 개척자적 자세로 미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발자취 등을 담은 자료들을 볼수 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한인노동자들의 고된 생활을 담은 영상물은 깊은 감회를 갖게 해준다. 하와이 한인학교를 연출해 놓은 교실에서는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한국어로 만든 교과서들을 볼수 있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들이었다.


제3전시실은 ‘또 다른 삶과 구국 염원’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중남미로 떠난 한인들의 또 다른 삶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을 바쳤던 선열들의 활약상을 볼수 있다. 특히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보내졌던 이민자들의 가혹한 노동환경을 볼수 있었고 이어 쿠바, 파라과이 등 남미 지역으로 떠난 이민자들의 삶에 대하여 알수 있는 전시장이다.

제4전시실은 ‘세계속의 대한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전세계 각국으로 진출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7백만 해외동포들의 근황과 조국발전을 위한 염원을 볼수 있다. 해외한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각종 해외이민기념사업과 문화행사에 대하여도 살펴볼수 있다.


이민사박물관을 가려면 전철로 인천역까지 간후 역전에서 월미도행 버스 45번이나 720번을 타고 해사고등학교 앞에서 내리면 된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공서 공휴일에는 문을 열지만 대신 그 다음날은 휴관이다. 관람요금은 2009년 5월 초 현재, 개관기념으로 무료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으면 http://wolmi.incheon.go.kr을 찾아보면 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민자들은 고향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녀드을 양육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며 이국에 정착하였다. 이 꽃밭은 이민사박물관 현관 옆에 마련되어 있다.

 이민사박물관의 전시실. 수많은 귀중한 자료들이 정성껏 전시되어 있다. 이런데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는 것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다.   

 사진 결혼에 대한 전시. 서로 사진만 보고 결혼하던 시절이 있었다. 용기있는 여성들이었다. 이런 여성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역만리에서 버티며 살수 있었다.

 이민자들이 어떻게 타국문화에 적응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전시. 아마 한국사람들처럼 극성스러운 민족들도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 자녀들 교육에서 그러했다.

 첫 이민선 갤릭호에 탔던 이민자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이 가지고 떠난 짐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의 한인 이민노동자 거처. 그래도 장독대는 마련되어 있었다.

 이민사박물관 정원에 있는 첫 이민자 출발지 기념물. 역사적인 장소이다.

하와이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는 첫 이민자들의 모습. 그들이 파인애플을 수확할 때에 사용하던 칼 등도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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