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거장 건축가

Eduard van der Nüll(에두아르드 반 데어 뉠)

정준극 2009. 5. 19. 04:42

Eduard van der Nüll(에두아르드 반 데어 뉠)

슈타츠오퍼

 

 


비엔나 시민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물은? 비엔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국립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 Staatsoper)이다. 2차 대전의 막바지에 슈타츠오퍼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비참한 모습으로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비엔나 시와 오스트리아 정부는 어려운 재정 형편 중에서도 슈타츠오퍼를 가장 먼저 복구키로 했다. 슈타츠오퍼는 비엔나의 상징이며 비엔나 시민들의 영혼이 담긴 건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슈타츠오퍼를 처음 설계한 사람이 에드아르드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과 동료인 아우구스트 지카르즈부르크였다. 슈타츠오퍼는 링슈트라쎄를 확장개편 할 때에 건설된 건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심심할지 모르지만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이며 더구나 무대 장치는 세계적이다.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의 밤 


반 데어 뉠은 이름이 보여주듯 네덜란드 계통이다. 일찍이 그의 조부가 비엔나로 이주하여 와서 살았기 때문에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교회에서 세례 받은 기록을 보면 1812년 1월 9일로 되어 있다. 1812년이라고 하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 해로서 유럽은 온통 나폴레옹이 불붙인 전화(戰火)에 혼란만 가중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비엔나에서 태어난 반 데어 뉠은 뜻한바 있어서 비엔나폴리테크닉에 들어가 건축을 공부했다. 그는 서유럽의 건축양식에 대하여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폴리테크닉을 수료한 그는 이 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학교 당국은 반 데어 뉠을 위해 특별히 Perspektive und Ornamentik(원근법과 장식법)학과를 새로 만들어 주었다. 반 데어 뉠은 실생활과 예술의 상호 보완적 입장에서의 건축물을 추구했다. 그러나 비록 실생활적이라고 해도 장식적이며 심미적인 요소는 크게 강조하였다. 그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1847년 레오폴드슈타트(Leopoldstadt)의 칼극장(Carl-Theater)이었다. 곧이어 병참고(Arsenal)의 사령부건물도 책임 맡았다.


1860년 합스부르크에서 비엔나 링의 중심에 궁정오페라극장(현 슈타츠오퍼)을 짓기로 하고 설계를 공모하자 반 데어 뉠은 동료인 지카르트 폰  르즈부르그(Sicard von Sicardsburg)와 함께 응모하여 당당히 선정되었다. 궁정오페라극장은 1861-1868년간 건축되었다. 궁정오페라극장은 링슈트라쎄을 확장 개편하는 대작업에서 가장 먼저 완성된 건물이었다. 비엔나 시민들은 궁정오페라극장이 파리의 오페라(L'Oper)극장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화려하게 건축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완성된 건물은 단순한 디자인이었으며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는 밋밋한 네모의 건물이었다. 사람들은 신문을 앞장세워서 두 사람의 건축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링슈트라쎄에서 제일 처음 완성된 건물이 반쪽짜리 성공이라고 비평했다. 심지어 프란츠 요셉 황제도 ‘무슨 궁정오페라극장이 이래?’라면서 비평의 대열에 합류했다. 얼마후 궁정오페라극장의 앞길을 상당히 높이 돋우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궁정오페라극장은 더 파묻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물에 빠진 상자’라면서 빈정댔다.

 

헬덴플라츠(영웅광장)의 오이겐 공자 기마상


반 데어 뉠은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 있는 두 개의 유명한 기마상, 즉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과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을 제작하는데 참여했다. 조각가인 안톤 페른코른(Anton Fernkorn)을 도와 궁정오페라극장의 건설을 시작하기 1년전인 1859년에 완성했다.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은 기마상 조각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말의 뒷발굼치로만 모든 중력을 감당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을 성공적으로 제작한 반 데어 뉠은 똑 같은 기법으로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을 제작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시도를 해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이겐 공자의 기마상은 말의 뒷발과 함께 꼬리가 중력을 지탱토록 되어 있다. 페른코른을 비롯한 반 데어 뉠은 이 일로 인하여 매우 낙담하였다. 어째서 똑같은 조각작품을 만들지 못할까라는 자괴심 때문이었다. 그러던 입장에서 궁정오페라극장의 건축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헬덴플라츠(영웅광장)의 샤를르 대공 기마상 


에두아르드 반 데어 뉠은 궁정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에 대하여 사람들이 빈정대는 것을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1868년 4월 4일 목매달아 자살했다. 그로부터 10주 후에는 파트너인 폰 지카르즈부르크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위대한 두 건축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후로 황제는 새로 짓는 건축물에 대하여 어떠한 비평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참으로 아름답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라는 두 마디의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로 했다. 반 데어 뉠은 중앙공동묘지 예술가 구역에 안장되었다(32A 5번). 7년후인 1875년, 비엔나시는 반 데어 뉠을 기념하여 그가 살았던 10구 화보리텐의 거리를 반 데어 뉠 가쎄(Van-der-Null -Gasse)라고 이름 붙였다. 반 데어 뉠가쎄와 다비드가쎄(Davidgasse)가 만나는 곳에 반 데어 뉠의 모습을 모자익으로 그린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반 데어 뉠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지카르트 폰 지카르즈부르크와 공동으로 1873년의 비엔나 엑스포에서 산업관(Industriepalast)등을 완성했다. 반 데어 뉠은 프라터슈트라쎄에 있었던 칼극장(Carltheater), 남부역 인근에 있는 비엔나 병참고(현재의 군사박물관), 그리고 슈테판성당 앞에 있는 하스-하우스(Haas-Haus)의 기본설계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