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Alban Berg(알반 베르크)

정준극 2009. 5. 28. 21:51

Alban Berg(알반 베르크)

제2비엔나학파의 주류

 

 

알반 베르크


알반 베르크(Alban Berg)는 아놀트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과 함께 제2비엔나 학파에 속하는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말러의 로만티시즘(낭만주의)을 결합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쇤베르크의 13음 기법을 채택하였다.

알반 베르크의 풀 네임은 알반 마리아 요한네스 베르크(Alban Maria Johannes Berg)이다. 1885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구 투흐라우벤(Tuchlauben) 8번지이다. 아버지 콘라트(Conrad)와 어머니 요한나(Johanna)의 네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알반 베르크가 15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그의 가정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평안하게 살았었다. 알반 베르크는 어릴 때부터 음악보다는 문학에 더 취미가 있었다. 훗날 위대한 작곡가가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스스로 공부하여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반 베르크가 더 관심을 보인 것은 아마 이성일 것이다. 그는 마리 쇼이흘(Marie Scheuchl)이라는 자기집 하녀와 관계를 가져 17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딸 알비네(Albine)는 1902년 12월의 어느 추운날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카린티아 지방 쉬플링(Schifling)의 알반 베르크 두상

 

2년후 베르크는 집을 떠나 작곡가가 되려고 결심하고 아놀트 쇤베르크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르크는 정식으로 작곡 공부를 하지 못하여 기초지식조차 부족했었다. 쇤베르크는 베르크를 기특히 여기고 그에게 대위법, 음악이론, 화성학 등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총명한 베르크는 22세 때인 1907년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피아노 소나타였다. 가곡도 작곡했다. ‘일곱 개의 초기 노래’(Seiben Frühe Lieder)는 이때에 작곡한 것이다. 그중 3편의 가곡은 1907년에 비엔나에서 열린 ‘쇤베르크 제자발표회’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처음에 연습곡 형식으로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곡들은 나중에 정식으로 작품번호 1번으로 기록된 피아노 소나타에 반영되었다. 평론가들은 젊은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에 대하여 만만치 않은 훌륭한 곡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알반 베르크(유화)

 

베르크는 1911년까지 6년동안 쇤베르크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베르크는 쇤베르크를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자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존경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비록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평생을 친구로서 지냈다. 쇤베르크는 베르크보다 19년 위였다. 아마 베르크는 쇤베르크에게서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쇤베르크는 ‘작곡의 일관성은 단 하나의 기본 아이디어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그 아이디어라는 것은 훗날 ‘발전하는 변화’로 알려진 것이었다. 나중에 베르크는 그의 제자에게도 똑같은 내용을 가르쳤다. 베르크의 제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베르크로부터 작곡의 주요 원칙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임을 배웠다. 모든 것은 무엇인가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두 가지는 서로 다르다는 점도 강조하였다.’고 말했다.

 

베르크는 예술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분별없고 무모하기까지 한 세기 초의 시기에 비엔나 문화예술계의 엘리트중의 한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서클에는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프란츠 슈레커, 구스타브 클림트, 작가이며 풍자가인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 시인 페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06년, 베르크는 21세 때에 어떤 부유한 집안의 딸인 헬레네 나호브스키(Helene Nahowski)라는 가수를 만났다. 일설에 의하면 헬레네는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여배우인 안나 나호브스키(Anna Nahowski)와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 했다. 헬레네와 베르크는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물론 헬레네의 집에서는 베르크에 대하여 대단한 적대감을 가지고 반대하였지만 두 사람은 5년 동안의 연애기간을 거친후 1911년 5월 3일 도로테어가쎄(Dorotheergasse)에 있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베르크가 26세 때였다. 이 교회는 1901년에 베르크의 스승인 아놀트 쇤베르크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여동생인 마틸데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옛날 하녀였던 마리 쇼이흘은 어떻게 되었는가? 벌써 헤어졌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오페라 '룰루'의 한 장면

 

1913년, 페터 알텐버그의 시 ‘사진엽서에 쓴 다섯 편의 노래가사’에 곡을 붙인 베르크의 다섯 가곡중 두곡이 비엔나에서 쇤베르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가사는 마치 격언과 같은 내용으로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런 노래를 쇤베르크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반주했다. 청중들은 듣기에 거북한 멜로디와 불협화음 때문에 집어치우라고 하면서 소동을 피웠다. 그이후로 베르크의 페터 알텐버그의 시에 의한 가곡은 연주되지 못하다가 1952년에 가서야 다섯 곡 모두가 연주되었고 악보로 출판된 것은 1966년이었다.

 

1차 대전 중인 1915년부터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육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복무중인 1917년 휴가를 얻어 첫 오페라인 보체크(Wozzeck)의 작곡에 착수하였다. 보체크는 1922년에 완성되었다. 1차대전이 끝나자 그는 비엔나에 돌아와 정착했으며 쇤베르크가 운영하는 ‘개인공연협회’의 일을 돕는 한편 제자들을 두어 가르치기도 했다. ‘개인공연협회’라는 것은 연주의 기회를 얻지 못한 현대작곡가들에게 연주회를 주선해 주는 단체였다. 한편, 보체크가 처음으로 일반에게 선보인 것은 1924년이었다. 오페라 전체를 무대에 올린 것은 아니고 발췌곡 3편이 연주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이었다. 보체크가 정식으로 공연된 것은 1925년 12월이었다.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가 베를린에서 공연했다. 그로부터 보체크는 베르크의 대표작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베르크는 두 번째 오페라의 작곡에 도전했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룰루(Lulu)였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만 룰루의 제2막까지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제3막은 그로부터 약 40년 후인 1978년, 프리드리히 체르하(Friedrich Cerha)가 완성했다. 그러므로 베르크의 룰루는 2막까지만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필요한 경우에만 3막을 추가하여 공연한다.

 

오페라 '룰루'의 한 장면. 라이프치히 오페라

 

오페라 이외에 베르크의 작품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애수에 젖어 있는 듯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이 협주곡도 베르크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적용한 것이다.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의 딸인 마농(Manon)에게 헌정한 것이다. 알마 쉰들러는 구스타브 말러의 첫 부인이었었다. 마농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베르크의 서정적 조곡(Lyric Suite)은 벨라 바르토크의 현악4중주곡 제3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알반 베르크는 1935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비엔나의 3구 유흐가쎄(Juchgasse)에 있는 루돌프슈피탈(Rudolfspital)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벌레한테 물려 혈액에 독성이 들어가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향년 50세. 알반 베르크는 히칭거 프리드호프(Hietzinger Friedhof: 히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 끝에 붙어 있는 공동묘지이다.

 

오페라 '보체크'의 한 장면. 메트토폴리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