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Anton Bruckner(안톤 브루크너) - 1

정준극 2009. 5. 28. 21:56

Anton Bruckner(안톤 브루크너) - 1

오스트리아 낭만주의의 마지막 보루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간혹 오스트로-독일 낭만주의(로만티시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상징적 존재라는 평을 듣고 있다. 왜냐하면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낭만주의 교향곡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풍부한 화음적 언어, 복잡한 다성적 요소, 그리고 여유 있는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브루크너의 작품은 현대음악이라는 기치아래 급진주의로 흐르는 일부 작곡가들의 작품, 예를 들어 바그너 또는 휴고 볼프의 작품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브루크너는 급진주의가 불협화음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준비되지 않은 조음(調音)을 사용하고 있고 또한 산만한 화음을 도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낭만주의를 지향하는 작곡가들에게 일종의 모욕이었다. 그러나 브루크너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이들을 존경하고 이들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 브루크너와 작곡가 브루크너는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브루크너의 교향곡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지나치게 방대하기만 하며 새로운 테마의 전개보다는 반복적인 부분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게다가 브루크너가 그의 작품을 너무 자주 수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비난하였다. 실제로 브루크너는 작품을 자주 수정하였다. 어떤 때는 자기가 직접 수정하지도 않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수정했다. 문제는 수정하고 나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1860년대의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는 1824년 린츠 부근의 안스펠델(Ansfelde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교 교장 겸 교회 오르간 주자였다. 따라서 브루크너의 첫 음악교사는 아버지였다. 브루크너는 몇 년 동안 아버지의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했었다. 그런가하면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밤에는 마을 무도회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결국 음악을 전공키로 결심한 그는 산크트 플로리안(St Florian)에 있는 아우구스틴수도원에 들어가 작곡가 오르간을 공부했다. 그는 27세가 될 때까지 수도원의 오르간 주자로 일했다. 브루크너는 수도원에서의 음악공부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공부하는 타입이었다. 40세가 될 때까지 오토 키츨러(Otto Kitzler)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브루크너가 젊은 시절 음악을 공부했던 산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전경

 

오토 키츨러는 브루크너에게 바그너의 음악을 소개해 주었다. 그로부터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했으며 나중에는 바그너의 팬이 되었다. 브루크너의 천재성은 늦게 나타났다. 40세가 지나서야 재능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브루크너는 모차르트처럼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인생의 절반 정도를 지냈을 때부터 나타냈던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한발자국 늦게 나타났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도 60세가 지나서부터였다. 독실한 가톨릭이면서도 맥주를 즐겨 마시던 브루크너는 같은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에 비하여 대기만성의 체질이었다. 이때쯤 해서 브루크너는 리스트와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브루크너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인 리스트는 고전적인 화음의 세계를 개혁코자 했다. 브루크너는 리스트의 이러한 점에 대하여 대단히 존경했다. 당시 리스트는 바그너와 함께 새로운 독일학파를 주도하고 있었다. 40세가 지나서 내놓은 브루크너의 첫 작품은 D단조 미사였다.

 

브루크너는 44세 때인 1868년 비엔나음악원(콘서바토리)의 음악이론 교수 자리를 수락했다. 브루크너는 이곳에 있으면서 교향곡을 작곡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교향곡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브루크너의 교향곡이 ‘와일드’하고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는 묵묵히 교향곡 작곡에만 열심을 쏟았다. 1875년 그는 비엔나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브루크너는 비엔나대학교의 교과과정으로 음악이론이 포함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반적으로 볼때 브루크너의 비엔나대학교 생활을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러한 때에 비엔나 사회에서는 바그너 추종자와 브람스 추종자가 마치 원수처럼 서로를 비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래동안 바그너를 공부했던 브루크너는 자연히 바그너의 편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브루크너는 평론가 한스리크(Hanslick)등 브람스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는 중에도 브루크너에게 든든한 후원자들이 생겨났다.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Arhur Nikisch)와 프란스 샬크(Franz Schalk)는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브루크너의 음악을 되도록 대중들에게 자주 선보이도록 하기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주회의 프로그램에 넣었다. 이들은 브루크너의 음악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수 있도록 어떤 경우에는 수정도 해주었다. 원래부터 악보수정에 이력이 붙어있던 브루크너는 이들의 수정을 두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미리 만들어 놓은 유언장에서 나중에 비엔나국립도서관에 기증할 자기의 악보는 반드시 수정하지 않은 오리지널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세간의 사람들로서는 연주회에서 발표된 수정본 교향곡이 더 유효한 것인지 또는 오리지널이 더 유효한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브루크너가 오리지널 악보를 더 중요시한 것을 보면 대답은 분명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이외에도 미사곡, 합창곡, 실내악곡들을 썼다. 이런 작품들은 낭만적인 교향곡과는 달리 대단히 보수적이며 형식에 있어서도 고전적인 대위법을 많이 사용한 것이었다.

 

브루크너는 대단히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일화도 많다. 어느날 교향곡 제4번에 대한 리허설이 끝난 후에 브루크너가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에게 다가왔다. 브루크너의 얼굴에는 대단히 만족한 빛이 감돌았다. 오케스트라의 모든 대원들도 그만큼 기쁜 모습의 브루크너를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브루크너는 리히터의 손에 금화 한닢을 쥐어주면서 ‘이 돈으로 맥주 한잔을 사서 나의 건강을 위해 건배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리히터는 브루크너가 준 금화로 맥주를 사서 마시는 대신 금화를 시계줄에 매달아 평생을 간직했다. 브루크너는 당시 유명한 오르간 주자였다. 그는 1869년 프랑스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여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 1871년에는 영국에서의 연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엔나대학교에서 오르간도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나중에 뛰어난 오르간 주자가 된 한스 로트(Hans Rott),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등이 있다. 구스타브 말러도 브루크너가 비엔나대학교 교수일 때에 학생이었다. 말러는 브루크너를 ‘선구자’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말년의 브루크너(1894년)

 

브루크너의 고향인 안스펠덴에서 가까운 린츠(Linz)에는 안톤 브루크너 사립대학교가 있다. 1932년 브루크너를 기려서 설립한 음악, 연극, 무용을 가르치는 예술대학교이다. 나중에 이학교는 ‘린츠 브루크너 콘서바토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린츠에는 브루크너오케스트라도 있다. 브루크너는 비엔나에서 1구 헤렌가쎄(Herrengasse) 7번지에서 거의 20년을 살았다. 1877년부터 1895년까지였다. 브루크너는 3구 프린츠 오이겐 슈트라쎄(Prinz Eugen Strasse) 27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린츠 오이겐 슈트라쎄의 초입에 있는 거리는 브루크너를 기념하여 브루크너 슈트라쎄(Bruckner Strasse)라는 명칭을 붙였다.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에는 브루크너의 흉상이 설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