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Alexander Zemlinsky(알렉산더 쳄린스키)

정준극 2009. 5. 28. 21:54

Alexander Zemlinsky(알렉산더 쳄린스키)

뛰어난 작곡가, 탁월한 지휘자

 

 

알렉산더 쳄린스키

 

알렉산더 쳄린스키(또는 Alexander von Zemlinsky: 1871-1942)는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 겸 음악교사였다. 쳄린스키는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다문화가정이었다. 할아버지는 헝가리에서 비엔나로 이민온 사람이며 할머니는 오스트리아 여인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철저한 가톨릭이었다. 때문에 쳄린스키의 아버지 아돌프(Adolf)는 가톨릭으로 자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사라예보 출신으로 어머니의 아버지는 원래 스페인에서 온 유태인 계통이었으며 어머니의 어머니는 보스니아의 무슬림 여인이었다. 그러다가 쳄린스키의 가족 모두가 뜻한바 있어서 유태교로 개종하게 되어 쳄린스키도 어릴 때부터 유태인으로서 양육되었다. 쳄린스키의 아버지는 이름에 폰(von)을 추가하여 사용했다. 폰은 귀족의 이름에 붙이는 단어이다. 그렇다고 쳄린스키의 아버지가 귀족 출신이라는 근거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더구나 원래 쳄린스키라는 이름도 Semlinsky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뜻한바 있어서 독일 스타일인 Zemlinsky로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엔나에서 살자면 이런저런 트릭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쳄린스키 묘지와 기념조형물

 

쳄린스키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했다. 얼마후에는 안식일에 유태교 시나노그에 가서 오르간을 연주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쳄린스키의 아버지는 아들의 놀라운 재능을 보고 느낀바 있어서 쳄린스키의 손을 잡고 비엔나음악원의 문을 두드렸다. 쳄린스키는 13세 때에 아무나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비엔나음악원(Vienna Conservatory)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6년후인 19세 때에는 학교주최의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쳄린스키는 피아노와 함께 작곡도 공부했다. 그는 19세 때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1896년에 내놓은 클라리넷 트리오는 교수들의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요한네스 브람스가 쳄린스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적극 후원하기 시작했다. 쳄린스키로서는 행운이었다. 브람스는 쳄린스키의 클라리넷 트리오를 당시 유명한 음악출판사인 심록(Simlock)에 의뢰하여 출판토록 했다. 쳄린스키는 쇤베르크도 만났다. 그때 쇤베르크는 폴리힘니아(Polyhymnia)라는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쇤베르크와 쳄린스키는 절친한 친구사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급기야 쇤베르크가 쳄린스키의 여동생인 마틸데(Mathilde)와 결혼함으로서 처남매부사이가 되었다.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자 비엔나음악원을 나온 쳄린스키는 쇤베르크에게 무료로 대위법등을 가르쳤다. 아마 쳄린스키야 말로 쇤베르크의 유일한 공식 음악교사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쳄린스키와 뉴욕에서 지휘자로서의 쳄린스키(스케치)

 

1897년 쳄린스키의 교향곡 제2번이 비엔나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작곡가로서 쳄린스키의 명성은 얼마후 구스타브 말러가 1900년 궁정오페라극장에서 쳄린스키의 오페라 ‘옛날 옛적에’(Es war einmal)의 초연을 지휘하고부터 갑자기 높아졌다. 그로부터 쳄린스키는 우연한 기회에 비엔나 상류층 가정 출신인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알마 쉰들러는 쳄린스키로부터 작곡을 배우던 학생이었다. 알마도 쳄린스키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알마의 친구를 비롯하여 알마의 가족들은 쳄린스키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하며 대단한 압력을 가하였다. 쳄린스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우선 쳄린스키가 국제적으로 유명하지 못해서였지만 실제로는 쳄린스키가 삐쩍 마른 체구에 못생겼다고 하여 반대했다는 것이다. 결국 알마는 쳄린스키와 절교하고 1902년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하였다. 쳄린스키는 1907년 이다 구트만(Ida Guttmann)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생활은 불행한 것이었다. 1929년 이다가 세상을 떠나자 쳄린스키는 이듬해에 자기보다 29세나 어린 루이제 자흐젤(Luise Sachsel)이란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쳄린스키는 몇 년 전부터 루이제에게 성악레슨을 해왔다. 다행히 루이제와의 결혼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두사람의 행복한 관계는 쳄린스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엔나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오데온가쎄(Odeongasse) 3번지의 쳄린스키 기념상(오른쪽은 디테일)

                              

1906년 쳄린스키는 새로 문을 연 비엔나 폭스오퍼(Volksoper)의 합창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11년부터 1927년까지 무려 17년 동안은 프라하에 있는 독일극장(Deutsches Landestheater)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쳄린스키는 프라하에 있을 때인 1924년 쇤베르크의 오페라 ‘기다림’(Erwartung)의 세계초연을 지휘했다. 그후 쳄린스키는 베를린으로 자리를 옮겼다. 쳄린스키는 베를린의 크롤(Kroll)오페라극장에서 음악총감독인 오토 클렘페르(Otto Klemper)의 아래에서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나치가 득세하자 쳄린스키는 1933년 비엔나로 도피했다. 그러나 유태인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아무런 직장도 얻지 못했다. 그로부터 쳄린스키는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했다. 1938년 쳄린스키는 나치를 피하여 천신만고로 미국으로 도피하여 뉴욕에 정착했다. 유태인인 쇤베르크도 요행으로 미국에 도착하여 LA에 정착하였다. 쇤베르크는 UCLA등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연주활동도 부지런히 하여 새로운 조국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뉴욕에 있는 쳄린스키는 별다른 활동이 없이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지냈다. 힘든 생활을 거듭하던 쳄린스키는 급기야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아직도 전쟁 중인 1942년 고향 비엔나를 마음속에 그리며 뉴욕의 라취몬드(Larchmond)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부인 루이제와 함께 잔뜩 폼을 재고 있는 쳄린스키

 

쳄린스키의 대표작은 서정적교향곡(1923)이다. 오케스트라, 소프라노, 바리톤이 등장하는 전7악장의 교향곡이다. 벵갈의 시인 라빈드라나스 타골(Rabindranahth Tagor)의 시를 가사로 삼은 것이었다. 쳄린스키는 서정적교향곡이 말러의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와 비교할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쳄린스키의 서정적교향곡은 알반 베르크의 서정적 조곡(Lyric Suite)에 영향을 주었다. 알반 베르크는 서정적 조곡을 쳄린스키에게 헌정하였다. 쳄린스키의 교향시 ‘인어’(Die Seejungfrau)도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었다. ‘인어’는1905년 비엔나에서 쇤베르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쇤베르크의 지휘로 드빗시의 ‘플레아와 멜리상드’를 초연한 바로 그 오케스트라가 ‘인어’를 초연했다. 1934년에 내놓은 3악장의 신포니에타는 쇤베르크가 특별히 찬사를 보낸 작품이었다. 쳄린스키의 이 작품은 같은 시대의 작곡가들인 파울 힌데미트, 쿠르트 봐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현대 교향악적 작품들과 스타일이 비슷하였다. 쳄린스키의 다른 작품으로서는 오스카 와일드이 극본에 의한 오페라 ‘플로렌스의 비극’(Eine Florentinische Tragodie: 1916), 자서전적 오페라인 ‘난장이’(Der Zwerg: 1921), 발레음악인 ‘시간의 승리’(Der Triumph der Zeit: 1901)가 있다. 또 다른 오페라로서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는 ‘옷이 날개’(Kleider machen Leute), 사례마(Sarema), ‘칸다울레스 왕’(König Kandaules) 등이 있다. 1897년 뮌헨에서 초연된 오페라 사례마의 대본은 작곡자 자신이 주로 썼지만 그의 아버지인 아돌프 폰 쳄린스키도 한몫 거들었고 친구 쇤베르크도 대본작성에 참여한 것이다.

 

오페라 '칸달레우스 왕'의 한 장면

 

쳄린스키의 초기 작품에는 브람스의 영향이 많이 스며있었다. 그러나 후기 작품들은 바그너가 사용했던 하모니를 채택하였다. 후기 작품에서는 말러의 영향도 찾아볼수 있다. 반면, 쇤베르크가 오랜 친구였지만 쇤베르크가 지향하는 무조음악은 결코 작곡하지 않았으며 12음 기법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쳄린스키는 탁월한 지휘자였다. 쿠르트 봐일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쳄린스키의 지휘를 크게 찬양했다. 이들은 쳄린스키가 모차르트에서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지휘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쳄린스키 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