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Anton Bruckner(안톤 브루크너) - 2

정준극 2009. 5. 28. 21:58

Anton Bruckner(안톤 브루크너) - 2

 

브루크너는 9편의 교향곡을 남겼다. 브루크너가 아직도 학생일 때에 작곡교수인 오토 키츨러는 브루크너에게 졸업과제로서 합창곡, 서곡, 교향곡을 각각 한편씩 작곡토록 했다. 브루크너는 1863년 과제로 내준 교향곡을 완성했다. 교향곡 F단조이다. 나중에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을 습작이라고 하여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쓰레기로 버리지는 않았다. 로버트 슈만의 초기 교향곡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작곡교수인 키츨러도 이 교향곡을 ‘별로 감동적이지 않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 교향곡의 스타일은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교향곡이 초연된 것은 브루크너 사후 18년이 지난 1924년이었으며 악보로 출판된 것은 훨씬 후인 1973년이었다. 그때에는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이 이미 1번부터 9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었으므로 이 교향곡에는 ‘교향곡 제00번’이라는 이상한 작품번호가 붙여졌다.

 

 

오토 뵐러(Otto Boehler)가 그린 '천국에 도착한 브루크너' 실루엣 작품. 천국에 방금 도착한 브루크너(맨 왼쪽)를 이미 천국에 있는 리스트, 바그너, 슈베르트, 슈만, 베베, 모차르트, 베토벤, 글룩, 하이든, 헨델, 바흐(피아노치는 사람)가 환영하고 있는 장면.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1번 C 단조는 브루크너 자신이 ‘Daskecke Beserl'(건방진 아가씨)라고 부를 정도로 흥미 있는 작품이다. 1866년 완성되었다. 멋도 모르고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말괄량이 아가씨와 같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다. 브루크너의 다른 모든 교향곡들은 처음 발표된 이후 수정을 거듭한 것이 보통이었으나 교향곡 제1번만은 오랜 기간 동안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1998년에야 수정되었다. 브루크너의 다름 교향곡은 1867년에 내놓은 교향곡 제0번 D 단조이다.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었지만 평론가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브루크너는 작심하고 대폭적인 수정작업을 했다. 이 교향곡은 브루크너의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다. 그래서 교향곡 제0번이라는 특이한 번호가 붙었다. 교향곡 제2번은 네 번에 걸쳐 수정되었다. 간혹 ’중단 교향곡‘이라고 부른다. 전체 오케스트라가 중간에 한동안 연주를 중단하는 드라마와 같은 연출이 있기 때문이다. 바그너를 존경한 브루크너는 교향곡 제2번과 제3번의 두편을 바그너에게 보내 두편의 교향곡 중에서 한편을 헌정하겠으니 선택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바그너는 교향곡 제3번을 선택했다. 그런 연유로 교향곡 제3번은 ’바그너교향곡‘이라고 부른다. 바그너가 제3번을 선택한 것은 이 교향곡에 바그너의 발퀴레와 로렌그린의 테마가 인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브루크너는 나중에 교향곡 제3번을 수정하면서 바그너의 악극으로부터 인용한 요소를 제외하였다.

 

브루크너가 교향곡 작곡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교향곡 제4번으로부터였다. ‘낭만적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작품이다. 이 교향곡만이 작곡자 자신이 ‘낭만적 교향곡’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이다. 교향곡 제5번은 브루크너가 가장 왕성하게 교향곡을 작곡하던 시절의 대표작이다. 다른 교향곡과는 달리 오리지널이 어떠했는지 알기가 어려우며 우리가 오늘날 감상하고 있는 제5번은 1878년 버전이다. 제5번은 브루크너의 전작품 중에서 대위법이 가장 충실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교향곡 제6번은 브루크너의 특유의 리듬으로 인하여 연주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잊혀 진 교향곡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다. 교향곡 제7번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아직도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을 작곡 중일때 바그너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 대한 애도의 의미로 아디지오(Adagio) 파트를 특별히 느린 템포로 표현했다. 이와 함께 이른바 바그너 튜바가 처음으로 등장토록 했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후

 

브루크너는 교향곡 제8번을 완성하고 초연을 지휘할 헤르만 레비(Hermann Levi)에게 악보를 보냈다. 레비는 교향곡 제7번이 베토벤 이후에 나온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브루크너는 제8번을 정성스럽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완성했다. 제8번의 초연은 성공이었다. 브루크너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것은 교향곡 제9번이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제9번을 하나님께 헌정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모두가 전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브루크너는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3악장 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9번만이 유일하게 3악장으로 남아 있다. 제9번은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난지 7년후인 1903년 비엔나에서 초연되었다. 브루크너는 제9번의 4악장을 테 데움(Te Deum: 환희의 성가)으로 작곡코자 했다. 베토벤의 제9번에 대한 존경심에서였다. 브루크너는 테 데움에 대한 스케치는 해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9번이 D장조인데 테 데움을 장엄한 느낌을 주는 C장조로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난후 그가 스케치 해놓은 4악장을 보완하여 연주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3악장까지만 연주되고 있다.

 

나치가 세력을 잡은후 많은 음악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나치는 브루크너를 훌륭한 작곡가로 인정하였다. 히틀러는 1937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발할라(Walhalla: 국가적인 영웅들을 모신 국립현충원과 같은 곳)에 브루크너의 흉상을 봉헌하고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린츠가 히틀러를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히틀러는 린츠 부근이 브라우나우-암-인(Braunau-am-Inn)출신이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브루크너 역시 린츠 부근의 안스펠덴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브루크너가 바그너를 대단히 존경한 것도 히틀러에게 감동을 주었다. 히틀러는 바그너를 우상처럼 여겼다. 히틀러도 브루크너와 같은 예술가로서(히틀러는 화가 지망생이었음) 젊은 시절에 비엔나의 기성세대, 특히 유태인으로부터 거부를 당했던 것도 히틀러가 브루크너를 존경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브루크너는 나치 독일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독일 라디오방송(Deutscher Reichsrundfunk)은 바그너와 함께 브루크너의 작품을 자주 방송했다. 특히 1945년 5월 1일 히틀러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 이후 독일 라디오 방송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의 2악장 아다지오를 계속하여 방송했다. 브루크너가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여 작곡한 악장이었다. 나치가 브루크너의 음악을 즐겨했다고 해서 전쟁후에 브루크너가 친나치주의자로 간주된 것은 아니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종전후에도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영화음악이나 TV음악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세계적 지휘자 중에서 브루크너의 작품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람은 우선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를 들수 있다. 발터는 브루크너의 작품을 미국에 열심히 소개한 ‘친선대사’였다. 발터는 ‘브루크너와 말러’라는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게오르그 틴트너(Georg Tintner)는 브루크너의 전작품을 낙소스 레벨로 취입하여 찬사를 받았다. 브루크너는 작품의 대부분을 비엔나에서 작곡했다. 오늘날 브루크너의 작품은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대체로 다른 작곡가들의 교향곡에 비하여 연주시간이 길며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유럽의 방송들은 휴일 프로그램을 편성할 때에 연주시간이 긴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자주 선정한다.

 

브루크너는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어느때 누가 브루크너에게 교향곡의 어떤 파트를 수정할 것을 권고하자 브루크너는 ‘물론입니다. 그렇게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작곡가 중에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에게 재능을 주셨습니다. 나의 재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구스타브 말러는 그러한 브루크너에 대하여 ‘브루크너는 반은 바보와 같은 인간이고 반은 신이다’라고 말했다. 브루크너는 그가 처음 음악을 공부했던 린츠 부근에 있는 산크트 플로리안(St Florian)수도원 교회의 대오르간 아래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