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Felix von Weingartner(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

정준극 2009. 5. 28. 22:12

Felix von Weingartner(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

위대한 지휘자 겸 작곡가

 

 

 

파울 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1863년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하여 있던 달마티아(Dalmatia)의 자라(Zara)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곳은 크로아티아의 차다르(Zadar)이다. 그의 부모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봐인가르트너의 가족은 1868년 그라츠로 옮겨왔다. 그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음악에 뜻을 둔 봐인가르트너는 빌헬름 마이어(Wilhelm Mayer)라는 훌륭한 작곡교수에게 사사했다. 그는 페루치오 부조니의 스승이기도 했다. 봐이마르에 간 봐인가르트너는 프란츠 리스트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봐인가르트너의 첫 오페라인 자쿤탈라(Sakuntala)는 1884년 봐이마르에서 초연되었다. 리스트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봐이마르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당시 봐이마르 오케스트라는 수준이 높지 않았다. 그래서 자쿤탈라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초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봐이마르를 떠난 봐인가르트너는 쾨니히스버그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후 그는 단치히(Danzig), 함부르크, 만하임에서 합창지휘자 등으로 활동했다. 1891년, 그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베를린 왕실오페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가 태어난 현 크로아티아의 차다르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봐인가르트너는 1902년 마인츠(Mainz)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전편을 지휘하여 독일의 정상급 지휘자로서 찬사를 받았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1911년까지는 구스타브 말러의 후임으로 비엔나 궁정오페라(현 슈타츠오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20년 그는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후 1927-34년에는 바젤(Basel)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그의 마지막 지휘는 1940년 런던에서였다. 2년후인 1942년 그는 스위스의 반터투르(Winterthur)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휘자로서 봐인가르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처음으로 취입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35년에는 비제의 교향곡 C장조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지휘자가 된 그의 제자로서는 파울 자허(Paul Sacher), 게오르그 틴트너(Georg Tintner), 요셉 크립스(Josef Krips)등이 있다. 봐인가르트너는 네 번이나 결혼했다. 1891년에는 마리 유일러라트(Marie Juillerat)와, 1903년에는 훼도라 폰 드라이루스(Fedora von Dreifus)남작부인과, 1912년에는 메조소프라노 루실 마르셀(Lucille Marcel)과, 그리고 1922년에는 배우인 록소 베티 칼리슈(Roxo Betty Kalisch)와 결혼했다. 메조소프라노 마르셀은 1921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별했다.

 

봐인가르트너는 경력의 대부분을 지휘자로 보냈지만 실상 작곡가로서도 중요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교향곡은 일곱 편을 작곡했다. 이외에도 신포니에타,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 현악4중주곡, 피아노와 현악과 클라리넷을 위한 5중주곡, 그리고 여러 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가장 히트한 가곡은 ‘사랑의 축제’(Liebesfeier)였다. 그의 오페라는 뮤지컬 스타일로서 멜로디에 큰 비중을 둔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그의 오페라가 낭만주의와 초기 모더니즘의 혼합으로서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브 말러, 프란츠 슈레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작품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봐인가르트너의 작곡 방식은 에리히 코른골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봐인가르트너를 존경했던 코른골트는 그가 가장 아끼는 신포니에터를 봐인가르트너에게 헌정했다. 봐인가르트너는 이 곡의 세계초연을 지휘했다. 그의 교향곡 제3번은 나중에 아내가 된 메조소프라노 루실 마르셀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 교향곡의 피날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에 나오는 월츠를 풍자적으로 모방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낳았다. 루실 마르셀이 세상을 떠난후 작곡에 착수한 교향곡 제5번은 나중에 네 번째 부인이 된 록소 베티의 생일에 맞추어 완성했다. 봐인가르트너는 이 교향곡을 결혼식장에서 신부에게 헌정하여 헌신적인 남편으로서의 인상을 주었다.

 

 젊은 시절의 봐인가르트너

 

봐인가르트너는 베를리오즈의 전작품을 편집했다. 그는 베를리오즈를 ‘현대 오케스트라의 창조자’라고 불렀다. 그는 메울(Mehul)의 오페라 ‘조셉’, 베버의 ‘오베론’을 편집했으며 글룩과 바그너의 작품도 오케스트라로 편곡했다. 봐인가르트너는 청년시절부터 비교(秘敎), 점성술, 동방 신비주의 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것들의 그의 철학과 작품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그는 봐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전에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일이 있다. 그는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적 드라마인 골고다(Golgotha)는 1908년 출판되어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는 특히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의 교향곡에 대한 글을 상당히 많이 썼다. 그는 1923년 자서전적인 책인 ‘생의 회상’(Lebenserinnering)을 출판했다.

 

그가 남긴 여러 작품중 오페라는 다음과 같다. Sakuntala(1884), Malawika und Agnimitra(1885), Genesius(1892), Trilogy Orestes(1901), Spring Fairy-Play(1908), Kain and Abel(1914), Dame Kobold(1916), Terakoya(Die Dorfschule: 1920), Meister Andrea(1919), Der Apostat(미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