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5

정준극 2009. 5. 28. 22:19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5

 

 

이제 다시 마리 다구(Marie d'Agoult)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 보자. 어차피 리스트에 대한 얘기가 처음부터 길어졌으므로 마리 다구에 대한 얘기를 뺀다고 해서 분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므로 수다를 떨고자 한다. 마리 다구가 리스트를 처음 만난 것은 1833년 파리의 바이어(Vayer)자작 집 저녁모임에서였다. 그날 저녁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후 리스트는 다른 집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러는 사이에 마리 다구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서로 호감을 가진 두 남녀가 자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쉽게 예측할수 있는 노릇이다. 마리 다구는 음악적 소양이 매우 높은 여인이었다. 그 자신이 피아니스트였고 작곡도 몇곡 했다. 마리 다구가 작곡한 가곡으로서는 하이네의 시에 의한 ‘로렐라이’도 있다. 어느날 리스트는 마리 다구에게 슈베르트의 4개의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함께 연주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연주하는 경우가 더러 생겼다. 마리 다구는 노래도 잘 불렀다. 베토벤, 슈베르트, 베를리오즈의 가곡을 불렀다. 특히 슈베르트의 ‘마왕’은 감동적이었다. 그런 마리 다구에 대하여 리스트가 마음을 쏟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마리 다구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에 대하여 냉담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며 환호해도 마리 다구만은 가만히 있었다. 마리 다구는 리스트가 피아노 연주자로서가 아니라 작곡가로서 위대하게 될 것으로 믿고 사소한 피아노 연주에 대하여는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 달후인 1833년 5월, 리스트는 미라 다구를 위해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uses를 작곡하여 헌정했다.

 

마리 다구. 어, 밍크 코트!

 

그러다가 1833년 8월, 이른바 노트르담(Notre Dame) 사원의 스캔들이 생겼다. 마리 다구는 리스트가 노트르담의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싶어 했다. 마리 다구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밤중에 리스트와 다른 남자 한두사람이 노트르담 사원에 들어갈수 있도록 주선했다. 당시에 대성당에는 밤에 아무나 들어가서 오르간을 연주할수 없었다. 더구나 여자가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다. 마리 다구는 남장을 하고 리스트와 또 다른 남자와 함께 노트르담 사원에 들어갔고 리스트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그로부터 둘이서 사귄다는 소문이 퍼졌다. 점잖은 가문의 마리 다구로서는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두어달 동안 리스트와 마리 다구는 일체의 연락도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마리 다구는 베를리오즈가 주선한 음악회에 모처럼 참석하였다. 이 음악회에서는 리스트가 베버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원래 굳은 땅에 물이 고이면 잘 빠지지 않는 법이다. 

 

1833-34년 겨울에 리스트는 없는 살림에 파리 근교에 별장을 빌렸다. 마리 다구는 이 별장으로 리스트를 여러번 방문하였다. 마리 다구는 B백작(Comte de la B)이라고 가장하고 남장으로 별장에 드나들었다. 리스트도 마리 다구의 저택을 몇 번 방문하였다. 리스트는 마리 다구의 딸들과 친하게 지냈다. 마리 다구의 딸들은 리스트를 Bon Vieux라고 불렀다. ‘좋은 아저씨’라는 뜻이다. 두 사람의 사이는 더할수 없이 좋아 보였다. 이후 리스트와 마리 다구의 관계는 도를 넘을 만큼 진지했었다. 두 사람의 밀월은 온 동리 사람들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든 것이 정도가 아닌 것은 끝을 보기 마련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마리 다구의 딸 루이스(Louise)가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리 다구는 그 일로 인하여 리스트와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30대의 리스트

 

마리 다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후 리스트는 조르즈 상드(Goerge Sand)를 알게 되었다. 리스트는 잡지에서 상드의 이탈리아 기행문을 읽고 대단히 감동을 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리스트는 결혼은 죄악이라는 성시몬의 이념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는데 조르즈 상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 대신에 연애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조르즈 상드도 결혼과는 상관없는 여러번에 걸친 연애 경험이 있었다. 연애에 관한한 자유분방했다. 알프레드 드 뮈쎄(Alfred de Musset)라는 사람은 상드의 상대자의 하나였다. 뮈쎄와 상드는 불같이 뜨거워졌다가도 얼음같이 차가워지기를 반복하였다. 리스트는 조르즈 상드의 뮈쎄 문제에 대하여 도움이 되고자 했다. 결국 동정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전주곡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스트는 상드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 조르즈 상드는 쇼팽과 운명적인 사랑을 하였다. 그간의 사정들과 리스트의 입장 등에 대하여는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지면상 여기서 생략코자 한다. 다만, 마리 다구와의 관계 이후, 리스트가 조르즈 상드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것 같다.

 

 조르즈 상드

 

세월은 흘러 1847년이 되었다. 그해에 리스트는 우크라이나를 순회연주하는 중에 카롤린 폰 자인-비트겐슈타인(Carolyne von Sayn-Wittgenstein)공주를 만났다. 카롤린 공주는 훌륭한 작가였다. 카롤린 공주는 장편의 저서를 16권이나 썼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카롤린 공주의 현학적이면서도 수사학적인 긴 문장은 리스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리스트의 자서전과 ‘쇼팽전기’와 집시음악 분석집은 카롤린 공주의 수다스러울 정도로 수사학적인 스타일로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카롤린 공주와 리스트는 봐이마르에서 몇 년 동안 동거했다. 카롤린 공주는 리스트와 결혼코자 했다. 하지만 카롤린 공주는 한번 결혼한 이력이 있고 더구나 전남편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당국으로부터 재혼 허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을 위해 성모 마리아에게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까지 생겼다.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바그너와 결혼한 코지마였다. 카롤린 공주는 로마 가톨릭과의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1860년 9월 결혼할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리스트와 카롤린 공주는 1861년 10월 22일 로마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계획했다. 리스트는 결혼식 하루 전날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날밤 카롤린 공주는 난데없이 리스트와의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선언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리스트는 영문을 몰랐지만 카롤린 공주가 그렇게 선언했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4년후, 카롤린 공주는 리스트의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스트가 감사할줄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결혼을 취소했다고 말했다. 카롤린 공주는 리스트를 위해 많은 돈을 썼다. 거의 모든 재산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트는 봐이마르에서 카롤린 공주와 함께 지내는 중에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60년 9월에 가수 에밀리 게나스트(Emilie Genast)와 러브 어페어를 가졌었다는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이 사실을 안 카롤린 공주는 리스트에 대하여 너무나 실망하여 비록 오랜 기간 함께 동거하고 결혼을 위해 무한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혼을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항이지만 리스트는 에밀리 게나스트를 만나자마자 옛 애인인 마리 다구와 너무나 흡사한 점을 발견하고 그만 푹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리스트는 에밀리 게나스트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작곡하여 헌정하기까지 했다.

 

카롤린 공주와 어린 코지마

 

다시 봐이마르 시절로 돌아가서, 리스트는 1848년에 마담 F라고만 불리는 어떤 여인과 동거한 일이 있다. 마담 F는 비트겐슈타인 공자의 정부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리스트는 카롤린 공주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담 F와의 관계가 가능했던 것은 카롤린 공주가 상당기간 동안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지냈기 때문이었다. 리스트는 카롤린 공주가 다시 봐이마르로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고 마담 F를 급히 파리로 보냈다. 카롤린 공주의 눈앞에 봉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파리로 간 마담 F는 리스트의 어머니와 리스트의 전비서인 벨로니(Belloni)를 만나 리스트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고 상당액의 돈을 받아갔다. 그해 11월 마담 F는 아이를 낙태했다고 주장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편, 1853-54년에 리스트의 넘버 원 정부는 브뤼셀에 살고 있었던 아네스 스트리트 클린드워스(Agnes Street-Klindworth)라는 여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당시에 아무도 몰랐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리스트가 로마에서 카롤린 공주와 결혼키로 되어 있었던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아네스의 아이들 중에 한두명은 리스트의 아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대단한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