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6
젊은 시절의 리스트
1860년대는 리스트의 생활에 심각한 혼란이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리스트에게는 이미 자녀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의 어머니가 누군지는 확실히 발표되지 않았지만 리스트는 그들을 대단히 사랑했다. 그런데 1859년 12월에 아들 다니엘(Daniel)이 세상을 떠났다. 3년 후인 1862년에는 딸 블란딘(Blandine)이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리스트는 세상만사가 귀찮아서 혼자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은둔생활을 할 생각이었다. 리스트는 여인들과의 관계를 모두 단절키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은 그가 편곡한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에 잘 나타나 있다. 리스트는 탄호이저의 서곡을 편곡하면서 탄호이저가 비너스와 함께 지내는 광란의 장면을 모두 삭제하였던 것이다. 리스트는 자기가 탄호이저와 같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1년전인 1861년에는 마치 탄호이저가 투링기아(Thuringia)에서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봐이마르에서 로마로 갔었다. 리스트는 탄호이저처럼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였다. 가톨릭교회가 인정한 카롤린 공주와의 결혼이 취소된 것이 그것이다. 리스트는 자기의 방랑자와 같은 여성행각 때문에 인생의 불운이 닥쳐왔다고 생각했다. 리스트는 성욕을 극도로 자제하는 수도승과 같은 생활을 고려했다. 카롤린 공주도 리스트에게 그런 내용의 충고를 해준바 있다. 카롤린 공주는 성행위야 말로 세계에서 가장 죄악스러운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롤린 공주와 리스트 사이에는 코지마(Cosima)라는 사생아 딸이 있었다. 코지마는 나중에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와 스위스로 도피하여 결국은 결혼까지 했다. 그러므로 리스트는 바그너의 장인이 된다. 그 장인에 그 사위였다.
바이로이트 축제공원에 있는 코지마의 흉상. 나중에 바그너와 결혼한 코지마는 리스트의 딸이다.
리스트는 모든 사회활동에서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그는 로마 교외에 있는 마돈나 델 로사리오(Madonna del Rosario)라는 한적한 수도원을 찾아냈다. 1863년 6월, 리스트는 이 수도원에 작은 방 한 개를 얻어 지내기로 했다. 아무것도 없는 스파르타식 방이었다. 리스트는 카롤린 공주와 동거하고 있던 때인 1857년에 이미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어떤 성격의 수도회라는 것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더라고 잘 알것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리스트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규정을 준수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마돈나 델 로사리오 수도원에 들어가 스파르타식 생활을 시작한지 3년째인 1865년, 리스트는 드디어 수사로서 인정받아 머리를 삭발하였다. 프란치스코 수사들은 전체 머리를 삭발하는 것이 아니라 두정부(頭頂部), 즉 머리 꼭대기의 가운데 부분만 동그랗게 삭발한다. 리스트는 그런 삭발을 했다. 이로써 리스트는 비로소 가톨릭교회의 수사(修士)가 되었지만 그 전까지 2년여 동안은 문지기, 성경 낭독자, 복사(服事) 일을 했다. 리스트가 수도원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카롤린 공주는 리스트를 면회하여 이제 정신 차리고 아예 신부가 되는 길을 택하라고 권고했다. 리스트는 카롤린의 말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리스트는 현재 수도원에서 스파르트식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마음의 번뇌를 씻고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이므로 영원한 평안을 얻기 위해 신부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리스트는 한때 자살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남을 위해서, 그리고 신을 위해서 새롭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처럼 째째하게 법망이나 피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은 치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브라티슬라바 국립극장의 리스트 흉상
1865년 후반에, 리스트가 성직자가 되는 것을 촉진하는 몇가지 일들이 있었다. 마침 그때에 리스트의 ‘파우스트 에피소드’(Episoden aus Lenaus Faust)라는 피아노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첫 번째 곡인 ‘메피스토 왈츠’는 마을 주점에서의 저속하고 난잡한 장면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두 번째 곡은 모차르트의 진혼곡에 나오는 ‘콘푸타티스 말레딕티스’(Confutatis maledictis)와 라크리모사(Lacrymosa)와 같은 스타일로서 죄를 참회하는 죄인의 울부짖음과 죄를 용서 받은 후의 평안함이 표현된 곡이었다. 실상 리스트는 어릴 때 ‘신동 모차르트’와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성년이 된 리스트는 또다시 모차르트와 같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모든 개인적인 욕심을 헌신짝처럼 버린 리스트는 1865년 드디어 ‘아베 리스트’(Abbe Liszt: 신부 리스트)로서 다시 태어났다.
헝가리 콜로차에 있는 리스트 기념상
리스트는 1860년대에 로마에 있으면서 수도사의 생활을 하는 한편, 시간이 있는 대로 작곡에도 전념하였다. 주로 성스러운 종교음악을 작곡하였다. 오라토리오로서는 ‘성엘리자베트의 전설’(Die Legende von der heiligen Elisabeth)과 ‘그리스도’(Christus)가 있으며 미사곡으로서는 ‘합창 미사’(Missa choralis)와 ‘헝가리 대관식미사’(Ungarische Krönungmesse) 등이 있다. 피아노 작품도 여러 편 작곡했다. 대부분 종교적인 주제였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와 알레그리(Allegri)의 멜로디에 붙인 ‘시스티나 성당’(A la Chapelle Sixtine )이 있으며 ‘알렐루야’와 ‘아르카델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 d'Arcadelt), 그리고 또 다른 피아노 작품으로서 ‘아씨시의 성프란수아’(St Francois d'Assisi) 등이 있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 ‘아프리카 여인’에 붙인 변주곡도 후반부에는 종교음악 스타일로 만들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를 편곡한 것도 종교음악 스타일을 포함한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작품도 작곡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장면인 ‘사람의 죽음’(Liebestod)을 편곡한 것은 종교음악적인 것은 아니었다.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브에 의한 환상곡(Reverie), '시바의 여왕‘의 모티브에 의한 사반느(Sabeennes)와 같은 작품도 종교음악의 스타일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말년의 리스트
리스트는 아주 가끔 로마의 음악생활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주로 종교적인 음악활동이었다. 1863년 리스트는 팔라쪼 알티에리(Palazzo Altieri)에서의 콘서트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는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종교음악으로 편성하였다. 이날 콘서트에서는 리스트의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에서 영복(永福: Seligkeit)과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에서 ‘태양의 노래’가 연주되었고 이밖에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에서 아리아들, 바흐, 베토벤, 조르넬리(Jornelli), 멘델스존,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1866년 1월에 있었던 음악회에서는 그의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에서 ‘성모애상’(聖母哀傷: Stabat Mater)이 연주되었으며 한 달 후의 음악회에서는 그의 ‘단테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리스트는 로마에서의 음악생활에 크게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리스트의 마음속에는 종교에의 귀의도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도 아직 남아 있었다. 1869년 마침내 리스트는 봐이마르로 돌아왔다. 주로 피아노 마스터 클라스를 운영하였다. 다만, 1년에 몇 달 만을 가르치기로 했다. 리스트는 부다페스트의 ‘헝가리음악아카데미’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리스트는 부다페스트의 ‘헝가리음악원’에서도 1년에 몇 달 동안 가르쳤다. 그리고 로마에서도 지냈다. 이처럼 리스트는 1년을 셋으로 나누어 봐이마르, 부다페스트, 로마에서 지냈다. 봐이마르에는 ‘리스트음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부다페스트에는 ‘리스트 페렌크 음악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유진 달베르(Eugene d'Albert) 등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있다.
리스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진 달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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