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Schmidt(프란츠 슈미트)
작곡가 겸 첼리스트 겸 피아니스트
프란츠 슈미트
프란츠 슈미트는 뛰어난 작곡가였으며 아울러 첼리스트 겸 피아니스트였다. 슈미트는 1874년 프레스부르크(Pressburg)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이다. 첫 음악선생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로서 어린 슈미트에게 바흐의 키보드작품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음악 이론에 대하여는 형으로부터 배웠다. 형은 프레스부르크 프란체스코성당의 유명한 오르간 주자였다. 이렇듯 슈미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인 환경 속에서 자랐다. 슈미트의 가족은 그가 14세 때인 1888년 비엔나로 이주했다. 슈미트는 비엔나음악원에 들어갈수 있었다. 슈미트는 이곳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피아노 스승은 당대의 테오도르 레세티츠키(Theodor Leschetizky)였다. 슈미트는 비엔나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프란츠 슈미트의 고향인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브)의 궁전과 구시가지
졸업후 그는 비엔나궁정오페라 오케스트라(현 비엔나 필하모닉의 전신)의 첼리스트로 들어 갔다. 당시 지휘자는 구스타브 말러였다. 말러는 어찌된 일인지 첼로 솔로가 나오는 부분이 있으면 첼로 수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슈미트에게만 연주를 맡도록 했다. 그만큼 말러는 슈미트를 총애하였다. 슈미트는 비엔나궁정오페라 오케스트라에 있으면서 현악4중주단을 구성하여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 현악4중주단은 의사로서 음악애호가인 오스카르 아들러(Oskar Adler)가 후원하는 것이었다. 오스카르 아들러는 아놀트 쇤베르크의 친구로서 나중에는 쇤베르크와 슈미트의 주치의를 함께 맡았었다. 이로 인하여 쇤베르크와 슈미트는 각기 음악 스타일을 달랐지만 서로 존경하는 사이로서 지냈다.
슈미트의 피아노 스승인 테오도르 레세티츠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던 해에 슈미트는 국립음악아카데미(현재의 비엔나예술음악대학의 전신)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다. 1925년, 슈미트는 이 아카데미의 원장에 임명되었다. 슈미트는 국립음악아카데미에서 피아노, 대위법, 작곡, 첼로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나중에 유명한 음악가가 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뷔러(Friedrich Wührer)와 알프레드 로제(Alfred Rosé)는 대표적이며 작곡가로서도 테오도르 버거(Theodor Berger)등 기라성과 같은 인물들이 많다. 알프레드 로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제현악4중주단’을 창설한 아놀트 로제의 아들이었다. 빈필의 악장이기도 했던 아놀트 로제는 구스타브 말러가 처남이었다. 슈미트는 음악예술의 진흥에 기여한 공로로 ‘프란츠 요셉 훈장’을 받았으며 비엔나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슈미트의 개인생활은 그의 명예와 성공과는 달리 비참하고 메마른 것이었다. 그의 첫째 부인은 정신병에 걸려 일찍이 1919년부터 암 슈타인호프(Am Steinhof)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어야 했다. 1939년 슈미트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첫째 부인은 나치 치하의 비엔나에서 정신병자라는 이유 때문에 나치에 의한 인종청소 작업의 희생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슈미트에게는 엠마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엠마는 첫 아이를 출산한후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하여 슈미트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요양을 필요로 할 정도였다.그러나 그는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작곡에만 더욱 전념하였다. 1933년 발표한 교향곡 제4번은 ‘나의 딸을 위한 진혼곡’(Requiem for my Daughter)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슈미트는 오라토리오도 작곡했는데 역시 죽은 딸을 애도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슈미트의 두 번째 부인은 젊고 우수한 피아노 전공의 학생이었다. 슈미트는 모처럼 가정의 평화를 얻어 행복하였다.
그러나 젊은 부인은 몸이 허약하여 결혼후 날이면 날마다 병치레로서 지냈다. 이에 따라 슈미트의 건강도 점점 악화되었다. 슈미트는 1937년 은퇴를 결심했다. 이듬해인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나치는 슈미트를 제3제국의 새로운 지방이 된 오스트마르크(Ostmark)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추앙하였다. 그러면서 나치는 슈미트에게 ‘독일 부활’(The German Resurrection)이라는 칸타타를 작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슈미트는 전쟁이 끝난후 나치에 협조한 인사로 분류되었지만 실제로 슈미트는 나치로부터 그런 요구를 받자 차일피일하며 칸타타를 완성하지 않았다. 대신에 슈미트는 1939년 11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른 작품의 작곡에 온 힘을 다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한손 피아니스트인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을 위한 솔로 토카타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철학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동생이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유태계였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나치는 그를 퇴폐음악가로 규정하고 어떠한 연주도 하지 못하게 했다. 파울은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슈미트의 음악은 고전적인 비엔나 낭만주의 음악을 계승한 것이었다. 슈미트의 음악은 슈베르트, 브람스, 그리고 그의 스승인 브루크너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리스트와 브람스의 이국적인 집시 스타일의 음악도 사용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솔로와 합창과 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라토리오 ‘일곱 봉인의 성서’(Das Buch mit sieben Siegeln: 1938년 비엔나 초연)이다.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내용을 가져온 것으로 다분히 예언적인 내용이다. 예를 들면 유럽에 큰 재장이 닥칠 것이라는 것 등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2차 대전으로 큰 재앙을 경험하였다. 내용은 예언적인 것이지만 음악의 형태는 바흐와 헨델의 음악에서처럼 오스트리아-독일의 전통에 기본을 둔 것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주제로 삼아 오라토리오를 쓴 작곡가였다. 베르디가 레퀴엠에서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삼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슈미트의 오페라로서는 ‘노트르담’(Notre Dame: 빅토 위고 원작: 1914년 비엔나 초연)과 프레디군디스(Fredigundis: 1922년 베를린 초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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