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7

정준극 2009. 5. 28. 22:20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 7

 

잠언 말씀대로 '헛되도다'를 생각하는 노년의 리스트

 

1881년 7월 2일, 리스트는 봐이마르의 궁정식목원(Hofgärtnerei)의 계단에서 실족하여 아래로 떨어졌다. 그로 인하여 리스트는 8주 동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날의 사고는 리스트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평소에는 건강하게 보였으나 숨어 있던 질병들이 속속 모습을 들어 내보였다. 몸에는 부종(浮腫)이 있었다. 천식이 있었으며 불면증까지 겹쳐 있었다. 왼쪽 눈은 백내장이었고 만성 심장 질환을 겪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만성 심장 질환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었다. 리스트는 굴러떨어진지 5년후인 1886년 7월 31일 숨을 거두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렴이었다. 그의 딸 코지마가 주관한 바이로이트 음악축제(페스티발)에 참석했다가 폐렴이 도져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리스트는 바이로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리스트가 갑자기 서거한 이유로서는 의사들이 잘못 치료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날 밤 11시30분에 의사들은 심장 주변에 두 번의 주사를 놓았다. 통증을 덜기 위해 모르핀을 주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주장에 따르면 모르핀이 아니라 잘못하여 장뇌(樟腦)인 캄포르를 주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즉각적인 심근경색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어서 아직까지도 리스트의 사인은 폐렴으로 되어 있다.

 

 봐이마르 대공궁전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리스트만큼 피아노를 훌륭하게 연주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리스트는 깊이 있는 감정으로 고귀한 연주를 했다. 리스트의 연주 스타일이 얼마나 진지하고 훌륭했는지는 언제나 근엄한 모습의 어떤 남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는 에피소드만 보아도 알수 있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에 대한 평가, 그리고 그가 후대에 남긴 영향에 대하여는 무식한 필자로서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일이므로 여기서 중단코자 한다. 다만,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에 대한 몇가지 에피소드만 주섬주섬 담아보고자 한다. 리스트는 초견(初見)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1870년대의 어느 때에 리스트는 에드바르드 그리그(Edvard Grieg)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리스트는 처음보는 악보를 초견으로 훌륭하게 연주했다. 마침 그 장소에 있었던 그리그는 너무나 놀라고 감동해서 말문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10여년 전에도 리스트는 쇼팽의 연습곡을 초견으로 연주하여 쇼팽을 놀라게 한 일이 있다. 놀라운 것은 리스트가 초견으로 연주한 악보가 모두 손으로 그린 핸드 라이팅(Hand writing)이었다는 것이다.

 

봐이마르에 있는 프란츠 리스트의 묘지

 

리사이틀(Recital)이란 용어는 1840년 6월 리스트의 런던 연주회로부터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런던의 악보출판가인 브레데릭 빌(Frederick Beale)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리스트의 연주회를 리사이틀로 부르자고 리스트에게 제안하여 그렇게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리스트 이전에는 피아노 단독연주의 음악회가 없었다. 언제나 실내악이나 노래 프로그램이 함께 있었다. 피아노의 위상을 오늘날의 수준으로 높인 사람은 바로 리스트였다.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만으로도 충분히 음악회를 구성할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후 리스트 스타일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우랄산맥으로부터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리스트는 무려 3천명의 청중 앞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가진 일이 있다. 당시로서 3천명의 청중이라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리스트는 모든 곡목을 암기하여 리사이틀을 가진 최초의 피아니스트이다. 리스트에게 있어서 피아노에 악보를 놓고 연주한다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리스트는 무대에서 피아노를 청중석을 향하여 오른쪽에 놓고 연주한 첫 번째 피아니스트였다. 당시에는 객석에서 볼때에 무대의 오른쪽에 피아노를 두었었다. 리스트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객석에서도 잘 볼수 있도록 피아노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리고 리스트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 리드(Lid: 뚜껑)를 열어 놓고 연주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의 소리가 강당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리스트의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므로 리스트에 대하여 좀 더 연구하여 더 많은 내용을 적고자 했으나 역시 너무 장황하면 오히려 감동이 반감하는 일이므로 나머지는 모두 생략키로 한다.

 

봐이마르에 있는 리스트의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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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론(Sopron)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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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론의 고성

 

헝가리에 소프론이라는 도시가 있다. 헝가리의 서쪽 끝,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다. 오스트리아로서 보면 동쪽 끝에 있는 도시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이지들러제(Neusiedler See) 호수극장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도시이다. 노이지들러제는 헝가리에서는 페르퇴(Fertö)라고 부른다. 독일어와 헝가리어의 명칭이 아주 다르다. 소프론도 마찬가지이다. 소프론은 헝가리어이지만 독일어로는 소프론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도 않은 외덴부르크(Ödenburg)이다. 그런데 크로아티아어로는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소프론이다. 소프론이 유명한 것은 한때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차 대전 이후 주민투표를 통해 헝가리로 편입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나라를 선택할수 있었으니 특별하기는 특별한 도시이다. 그 얘기는 잠시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소프론과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웬만한 도시라면 그 도시와 인연이 있는 유명인사가 적어도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잘츠부르크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잘츠부르크의 아들'이라고 하는 모차르트를 생각하게 되고 비엔나라고 하면 요한 슈트라우스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프론은 '소프론의 아들'로 피아노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리스트 페렌츠)를 선택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소프론의 인근에 있는 라이딩(Raiding)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라이딩은 독일어이고 헝가리어로는 도보르얀(Doborjan)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그러므로 혹자는 리스트가 헝가리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라이딩이 되었건 도보르얀이 되었던 이 마을은 묘하게도 두 나라의 국경지대에 걸쳐 있다보니 역사에 따라서 오스트리아가 되었다가 헝가리가 되기도 했고 헝가리였다가 오스트리아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리스트의 생가가 있는 라이딩은 현재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 주에 속한 마을이다. 그리고 리스트가 어릴 때 자주 갔었던 도보르얀은 오늘날 헝가리로서 소프론이다.

 

소프론 중앙광장

 

소프론에는 리스트와 관련된 몇몇 건물들과 장소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리스트 페렌츠 문화 센터'(Liszt Ferenc Cultural and Conference Center)이다. 연주회뿐만 아니라 국제규모의 회의도 할수 있는 장소이다. 또 하나의 건물은 소프론 중심가의 광장 한쪽에 있는 스토르노 하우스(Storno House)이다. 1482-83년의 겨울에 마티아스 왕이 머물렀던 장소로 유명하지만 프란츠 리스트가 1840년과 1881년에 콘서트를 가진 건물로서 더 유명하다. 리스트는 피아노 하나 만으로서 리사이틀을 가진 최초의 음악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스토르노 하우스에서의 연주회는 피아노 리사이틀이었음이 분명하다. 리스트는 11살 때에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사를 갔다. 그렇지만 리스트는 도보르얀, 나아가 소프론을 누가 뭐라고 해도 고향으로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소프론의 주민들도 리스트를 자기들 식구로 간주했다. 이제 소프론이 어떤 도시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리스트 페렌츠 문화 센터

 

오늘날 소프론이라고 부르는 도시와 그 일대는 로마제국 시대에 비교적 융성했던 도시였다. 그 때에는 스카르반티아(Scarbantia)라고 불렀다. 현재 소프론의 중앙광장이 있는 곳이 스카르반티아의 공회당이 있었던 장소였다. 그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시기가 지난 후에는 로마사람들이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스카르반티아는 황폐되었다가 9세기로부터 11세기에 걸쳐서 마쟈르 족이 몰려와서 정착함으로서 도시로서의 모습이 다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마쟈르인들은 옛 로마제국의 성벽들을 다시 세우고 중심지에 커다란 성을 건축했다. 마쟈르인들은 성의 관리를 책임 맡은 수프룬(Suprun)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 마을을 소프론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1153년의 기록에 의하면 소프론은 이미 헝가리에서도 중요한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다가 1273년에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가 소프론 성을 점령하였다. 오타카르 2세는 소프론이 헝가리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소프론 귀족들의 자제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그러나 헝가리의 라이슬라우스 4세가 소프론을 탈환하려고 오자 주민들은 귀족들의 자제들이 볼모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문을 활짝 열고 라디슬라우스 4세를 맞아 들였다. 라디슬라우스 4세는 소프론 백성들의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을 높이 치하하여서 소프론은 자유도시(free royal town)으로 격상해 주었다.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도시이지만 세금과 무역 등을 모두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수행할수 있는 도시로 만들어 준 것이다.

 

소프론의 성미하엘교회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를 지배할 때인 1529년에 오토만 터키는 소프론을 공략하여 그야말로 잔혹하게 약탈하고 처참하게 파괴하였다. 하지만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하고 물러갔다. 헝가리의 귀족들은 오토만 터키의 지배로부터 탈출하여 소프론으로 도피하였다. 그로부터 소프론은 헝가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당시 오토만 터키는 중부 유럽까지 진출하여 대부분을 장악하였지만 발라톤(Balaton) 호수 북쪽의 지역은 헝가리 왕국에 남아 있었다. 헝가리 왕국은 1538년부터 1867년까지 3백년 이상을 존재하다가 합스부르크의 우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로부터는 외덴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때는 외덴부르크-소프론이라는 복합명칭을 갖기도 했다. 외덴부르크-소프론은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타협(아우스글라이히) 이후 헝가리 왕국의 트란스라이타니아 지방에 속한 도시였다. 다시 말해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될 즈음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헝가리의 서쪽 4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4개 지역은 독일어로 프레스부르크(Pressburg)라고 하며 체코/슬로박어로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라고 하는 포초니(Poszony), 바스(Vas: Eisenburg), 소프론(Sopron: Ödenburg), 그리고 모손(Moson: Wieselburg)이다. 전쟁이 끝난후 이들 네개 지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1919년의 생제르맹조약(Treaty of Saint Germain)에 따라서 오스트리아에 속하도록 했다. 그러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우리는 헝가리에 남겠다'고 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소프론

결국 1921년 12월 14일에 소프론을 중심으로 해서 주민투표가 이루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민의 65%가 헝가리를 선택했다. 그래서 헝가리 땅이 되었다. 원래 소프론은 중세로부터 Civitas Fidelissima(가장 충성스론 도시)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헝가리에 충성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생제르맹조약에 의해서 소프론이 오스트리아로 속하게 되자 주민들은 다시한번 헝가리에 대한 전통적인 충성심을 발휘해서 결국 주민투표에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여 헝가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소프론에서는 주민투표가 치루어졌던 12월 14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소프론 인근까지 모두 헝가리로 귀속된 것은 아니다. 바스와 모손지역의 서쪽과 소프론의 서쪽(노이지들러제 인근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프레스부르크(포쪼니)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남게 되었다.

 

소프론은 2차 대전 중에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나치와 이들에게 협조하는 헝가리인들이 소프론의 수많은 저항 주민들과 유태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끌고 가서 모두 죽였다. 좌익 노동자들도 거의 모두 같은 운명을 겪었다. 소프론은 연합군의 폭격도 심하게 받아서 도시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1945년 4월 1일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소프론을 점령했다. 곧이어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에 철책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프론은 자유를 갈망하는 동구인들이 서방으로 넘어가는 문턱의 역할을 하였다. 1989년 8월 19일에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양쪽 국경지대에서 대규모 공산주의 항거 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범유럽피크닉(Pan-European Picnic)이라고 부른다. 이 날 6백명이나 되는 동독 주민들이 서방으로 넘어왔다. 이 사건이 계기가되어 그해 11월 9일,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헝가리의 공산정권은 소프론을 산업공단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시내 중심가의 중세 건물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목적지가 되었다. 소프론은 헝가리에서도 알아주는 포도주 생산지이다. 특히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를 함께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케크프란코스(Kekfrankos) 포도로는 적포도주를 만들며 트라미네르(Traminer) 포도로는 백포도주를 만든다. 소프론은 기후적으로 인근의 부르겐란트와 비슷해서 포도 재배가 잘 되고 있다. 소프론의 블루 프란키쉬와 피노 누아르는 특별히 사랑받는 와인이다.

 

와인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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