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Mahler(구스타브 말러) - 3
1902년 3월 9일, 말러는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 1879-1964)와 결혼하였다. 알마는 말러보다 20년 연하였다. 알마는 비엔나의 유명한 화가인 쉰들러의 딸이며 역시 화가인 칼 몰(Carl Moll)의 수양딸이었다. 알마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알마는 작곡도 했다. 그러나 말러는 알마와 결혼후 작곡과 같은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말러가 손으로 쓴 오리지널 악보를 정서(整書)하는 일은 맡아했다. 다른 오선지에 깨끗하게 옮겨 적는 일이었다. 말러는 어쩐 일인지 결혼후에도 다른 여자를 만났다. 상대방은 비올라 연주자인 나탈리 바우어-레흐너(Natalie Bauer-Lechner)였다. 말러보다 2년 연상이었다. 말러는 나탈리를 비엔나대학교에 다닐 때에 만났다. 얼마후 알마가 나탈리에 대하여 추궁하자 말러는 ‘그여자는 다만 필요에 의해서 만나는 것일 뿐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알마와 말러는 두 딸을 두었다. 첫딸은 마리아 안나(Maria Anna)로서 푸치(Putzi)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둘째 달은 안나(Anna)로서 구키(Gucki)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큰딸 푸치(1902-1907)는 겨우 네 살 때에 지프테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둘째 딸 안나(1904-1988)는 나중에 조각가가 되었다.
말러의 음악을 사용한 영화 '리타 교육하기'(Educating Rita)
말러는 첫째 딸 푸치의 죽음으로 마음에 크나큰 충격과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푸치가 죽은 그 해에 말러는 심각한 심장병에 걸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염성 심장내막염이었다. 힘든 운동은 절대로 하지 못했다. 걸어 다니는 것도 보행계(만보계와 같은 것)를 달고 일정거리만 걸어 다녀야 했다. 게다가 오페라극장에서 축적된 문제들이 말러의 심경을 괴롭혔다. 사실상 오페라극장에서는 예술문제에 대한 말러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적들이 많았다. 그런 적들은 반유태정서에 힘입어 말러를 공공연하게 공격하였다. 말러는 건강상의 문제와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오페라극장을 사임하지 않을수 없었다. 말러는 큰 딸 푸치의 장례식을 치룬후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알마 쉰들러와 말러의 두 딸들. 큰딸(왼쪽) 푸치는 4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말러의 음악에 대하여도 비평과 반대가 끊이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말러의 교향곡이 여러 요소들을 한데 섞은 접속곡(Potpourris)이라고 혹평했다. 심지어는 혼돈의 시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며 이는 제국의 정서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말러는 사회의 수준 높은 문화와 수준 낮은 문화를 포용하는 개념이었으며 아울러 여러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혼합하는 개념이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집단 움직임이 증폭하고 있었으며 또한 오스트로-헝가리제국 안에서 독일인, 체코인, 헝가리인, 유태인들이 서로 분쟁하여 불안과 불안정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물론 말러의 작품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1900년 뮌헨에서 발표한 교향곡 2번은 커다란 환영을 받았고 이어 1907년 비엔나에서의 교향곡 2번 연주도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10년 뮌헨에서의 교향곡 8번 초연은 종전에 볼수 없었던 웅장한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것이어서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1910년 이후에 작곡된 곡들은 그의 생전에 연주되지 못하였다.
말러가 비엔나 오페라를 떠나기로 한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좋은 조건으로 초청하였기 때문이었다. 말러는 1908년 한 시즌만을 메트로에서 지휘하였다. 그러나 마침 때를 맞추듯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가 메트로의 지휘자로 초청되자 말러는 토스카니니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당시 토스카니니는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편, 비엔나에서는 알마의 불륜이 들어나게 되어 말러의 결혼생활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말러는 1910년에 단 한번 뿐이었지만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자문을 받기까지 했다. 말러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말러는 뉴욕필의 지휘자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추진되어 온 일이었다. 1911년 1월, 말러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말러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Das Lied von der Erde(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을 완성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러나 말러는 미국에 도착한지 한달도 안되는 1911년 2월, 연쇄구균에 의한 혈액 감염병에 걸렸다. 말러는 몸에 불덩어리 같은 중에도 지휘를 하였다. 페루치오 부조니(Ferruccio Busoni)의 Berceuse elegiaque라는 곡의 초연이었다. 뉴욕필의 연주회 일정은 산적해 있었지만 말러로서는 어쩔수 없었다. 말러는 유럽으로 다시 건너갔다. 이번에는 파리로 갔다. 새로운 혈청이 개발되었다는 뉴스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새로운 혈청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말러는 비엔나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말러는 교향곡 10번을 미완성으로 남겨둔채 그해(1911년) 5월 18일 50세를 일기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집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설에는 3구 아우엔브루거가쎄(Auenbrugergasse) 2번지라고 한다. 러시아 적군(赤軍)상과 분수로 알려진 슈봐르첸버거플라츠에서 렌베그(Rennweg)로 올라가다가 초입에 있는 짧은 거리가 아우엔브루거가쎄이다.
미국 영화 '스타 트렉'에는 말러의 교향곡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사진은 USS Voyger 우주선
말러의 미망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말러의 마지막 말은 Mozartl(모차르틀: 모차르트를 사랑스럽게 부르는 표현)이라고 한다. 말러는 그의 요청에 따라 그린칭(Grinzing)공동묘지의 딸 옆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조용하게 치러졌다. 묘비에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GUSTAV MAHLER 라는 이름만 적혀있다. 말러의 오랜 친구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는 말러의 장례식에 대하여 ‘1911년 5월 18일 그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저녁, 우리는 그의 시신을 담은 관을 매장하기 위해 그린칭공동묘지에 도착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말러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마차를 따라왔다. 갑자기 폭풍우가 몰려오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장례식을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관을 땅속에 내리자마자 언제 그랬었냐는 듯 구름을 뚫고 해가 비쳤다.’라고 회고했다(1957년의 회고록에서).
그린칭 공동묘지의 구스타브 말러 묘지
알마는 말러가 죽음에 앞서 ‘나는 세 번이나 집이 없이 지냈다. 보헤미아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인으로서 독일인 사이에서, 세계에서 유태인으로서였다. 어느 곳에서나 외지인이었다. 한번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 말은 1870년대에 안톤 루빈슈타인이 쓴 글이며 말러는 그 글을 인용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마는 말러보다 50년을 더 살았다. 물론 혼자 살수가 없어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라는 군인과 재혼하였고 마농(Manon)이라는 딸을 두었다. 알마는 말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고와 악보들을 출판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말러를 표현한 알마의 글이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말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를 ‘알마 문제’(Alma Problem)라면서 분개해 했다. 예를 들면 알마는 말러와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을 마음대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마는 자기의 글에서 말러를 상당히 부정적인 사람으로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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