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Mahler(구스타브 말러) - 4
말러는 제1비엔나학파의 마지막 라인에 있는 작곡가였다. 제1비엔나학파는 실제로 그런 그룹은 없었지만 나중에 쇤베르크 등에 의한 제2비엔나학파에 대칭하여 제1비엔나학파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제1비엔나학파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와 낭만주의 작곡가인 브루크너와 브람스가 속한다. 말러는 이들을 마지막으로 계승한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할수 있다. 말러는 제1비엔나학파에 속하지 아니한 다른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아이디어도 자기의 작품에 반영하였다. 슈만과 멘델스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말러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바그너였다. 말러는 바그너를 베토벤 이후에 진정으로 유일하게 음악을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말러에게 많은 영향을 준 바그너. 그러나 바그너는 대단한 반유태주의자였다.
말러의 작품은 초기의 피아노 4중주곡인 칸타타 형식의 Das Klagende Lied(슬픈 노래)와 음조시 형식의 Totenfeir(죽음의 축제)를 제외하고는 크게 교향곡과 가곡으로 대별할수 있다. 말러는 모두 9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10번째 교향곡은 미완성이었다. 대표적인 가곡으로는 연작가곡(Song Cycle)인 Lieder eines fahrendedn Gesellen(방랑자의 노래: 보통 Songs of a Wayfarer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그보다는 Songs of a Travelling Journeyma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함), Kindertotenlieder(죽은 아이들의 노래), 그리고 교향곡과 연작가곡의 합작인 Das Lied von der Erde(대지의 노래)가 있다.
말러의 가곡은 독일적인 리트(Lied)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말러는 슈베르트와 슈만이 개발한 연작가곡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피아노 반주로 작곡하지 않고 오케스트라를 사용하는 반주를 채택하였다. ‘방랑자의 노래’는 4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을 거절당한 사람이 세상을 방황한다는 내용이다. 말러는 카쎌에 있을 때에 어떤 여자 성악가와의 사랑이 불행하게 끝난 것을 생각하고 이 연작가곡의 가사를 직접 썼다.
말러는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어떻게 입혀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향곡을 물이 흐르는 듯한 멜로디와 풍부한 하모니로 채웠다. 교향곡에 있어서 또 다른 특색은 큰 규모의 악기와 작은 규모의 악기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사용한 것이다. 이와 함께 사람의 목소리와 합창을 심포니 형태로 연합한 것이다. 그의 오케스트라 스타일은 대위법에 기본을 둔 것이다. 두 개의 멜로디가 서로 달리 시작하지만 거의 동시에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멜로디는 대규모 사운드 속에서도 맑게 울리도록 했다. 말러는 간혹 오스트리아 농부들의 노래와 춤곡을 교향곡에 도입하였다. 랜들러(Ländler)이다. 랜들러는 처음에는 미뉴엣으로 발전하다가 나중에는 왈츠로 발전한다. 교향곡 9번에서는 랜들러, 미뉴엣, 왈츠의 세가지 역사적인 단계가 ‘무곡악장’에 등장한다. 말러는 로만티시즘의 아이디어를 교향곡에 연합하였다. 노래 멜로디를 심포니 작품에 사용한 것은 좋은 예이다.
알마 쉰들러(알마 말러). 1909년
1907년 말러는 핀란드에서 콘서트 투어를 가졌다. 이때 말러는 동료인 얀 시벨리우스(Jan Sibelius)에게 ‘교향곡은 세계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러는 자기의 교향곡이 세계성을 띠지 못하는 것 같아 힘들어했다. 그래서 만족할 때까지 교향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을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말러는 ‘교향곡은 세계와 같다’는 철학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그의 교향곡의 예술적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새로운 장르로 만들고자 했다. 악장간의 대조의 폭을 넓혔다. 교향곡의 규모와 범위를 확대하는데 필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범위(Scope)를 확대한 것은 교향곡 3번의 경우로 연주시간이 95분이나 걸린다. 교향곡 중에서 가장 연주시간이 긴 작품일 것이다. 규모(Scale)를 확대한 경우는 교향곡 8번으로 연주자가 1천명 정도가 된다. 성악 파트의 가사도 민요와 같은 민속시(Folk poem)로부터 니체, 괴테, 중국 문학, 중세 로마 가톨릭의 신비주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말러의 교향곡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몇십년이 지나도록 무시되어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 그의 교향곡에 대한 가치가 재발견되어 세계 각국에서 연주회의 레퍼토리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895년의 말러
말러는 후대의 작곡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말러보다 한 세대 후의 인물인 쇤베르크는 말러를 ‘성자’(Saint)라고 까지 부르며 존경심을 표현했다. 쇤베르크는 말러를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예술에만 헌신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가 말러를 올바르게 대우하지 못했음도 지적했다. 이는 쇤베르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는 쇤베르크를 유태인이라고 하여 차별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말러의 음악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멜로디 구조가 불규칙적인 점을 들었다. 알반 베르크에 있어서는 말러로부터 인간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다. 베르크는 말러의 비극적 교향곡 6번을 ‘베토벤의 6번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6번’이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베르크의 작품에는 간혹 말러적 요소가 들어 있다. 예를 들면 말러의 교향곡 6번 피날레에 나오는 두 개의 햄머가 내는 소리는 베르크의 Three Orchestral Pieces의 마지막 악장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만, 베르크의 경우에는 일곱 개의 햄머가 소리를 내는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주제적 소재도 분명히 말러의 것이었다.
말러가 지휘자로서 처음 공식적으로 활동한 올로무츠의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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