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구스타브 클림트 - 2

정준극 2009. 6. 18. 21:27

구스타브 클림트 - 2

 

1894년 클림트는 비엔나대학교 대강당 천정을 장식하는 세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철학, 의학, 법학을 표현하는 천정화는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비판이 들끓었다. 그림의 표현이 극단적이며 내용이 도색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전통적인 알레고리(Allegory: 미술에서는 어떤 것을 비유하거나 상징하는 그림 기법)와 상징주의적 내용을 새로운 언어, 즉 주로 과도한 에로틱 취향의 내용으로 바꾸었다. 신성한 학문의 전당에 포르노적인 그림이 나타나게 되자 각계에서 비난이 터져 나왔다. 결국, 대강당의 천정화는 정치적, 심미적, 종교적 입장을 감안하여 그에 반하는 지나친 내용은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그리하여 수정을 거듭한 끝에 1900년대 초반에 가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비엔나대학교 대강당의 천정화는 클림트가 공식적으로 의뢰받은 마지막 작품이었다. 세 천정화는 1945년 나치의 SS가 퇴각하면서 모두 파괴하여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수 없다. 1902년 클림트는 제14회 제체시온 전시회와 관련하여 제체시온 건물의 지하 전시실에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를 완성하였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환희의 송가’를 주제로 삼은 프리즈화였다. 막스 클링거(Max Klinger)의 기념비적인 조각 작품도 추가되었다.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1902년의 제체시온 전시회만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제체시온은 이를 영구보존키로 하여 색채를 보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일견 퇴폐적인 모습과 그로테스크한 내용으로 1986년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었다.

 

베토벤 프리즈의 한 장면

 

클림트의 황금시기는 비판과 성공이 교차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작품중 대부분은 황금 이파리를 사용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황금색을 사용한 일이 있다. 1898년의 '팔라스 아테네'(Pallas Athene)와 1902년의'유디트 I'(Judith I)에서였다. 클림트의 황금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1907년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Adele Bloch-Bauer I)와 ‘키스’(Der Kuss)이다. 당시에 클림트는 베니스와 라벤나를 여행한 일이 있다. 베니스는 아름다운 모자익과 황금색을 입힌 유리공예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므로 그의 황금 이파리 작품은 베니스와 라벤나의 공예, 그리고 비잔틴의 이콘(성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1904년 그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사치스런 슈토클레트(Stoclet)궁전의 벽화와 천정화 장식을 맡았다. 부유한 벨기에 기업가의 저택인 슈토클레트 궁전의 내부는 아르 누보 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장소가 되었다. 클림트는 만찬실의 장식을 맡았다. ‘완성’과 ‘기대’라는 테마의 장식이었다. 이 작품들은 클림트의 가장 훌륭한 장식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그는 '모피를 두른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클림트는 모피 옷과 같은 의상들을 대단히 좋아했다. 동거녀였던 플뢰게의 사진을 보면 클림트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모델로 섰던 사진이 더러 있다. 그러나 클림트 자신은 평상시 작업 할 때에 샌달을 신고 긴 잠옷과 같은 옷을 입었다. 바지같은 것은 거의 입지 않았다. 그런면에서 보면 그의 생활은 마치 수도승처럼 간소했다.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이지만 의상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카페 생활도 즐겨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다. 당시에는 웬만한 예술가들은 카페에서 거의 살다시피하던 때였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I

 

클림트는 행복하게도 후원자가 줄을 서 있을 정도였다. 서로 파트론이 되겠다고 찾아왔다. 작가가 후원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들이 작가를 찾아 온 것이다. 클림트는 아무나 무조건 파트론으로 선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클림트의 파트론이 된 사람은 실상 몇 명밖에 되지 않는다. 클림트는 그림을 그릴때 대단히 전념하고 집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모델을 앞에 두고 장시간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클림트는 여성관계가 매우 빈번하였지만 그렇다고 분별없이 물개처럼 날뛰지는 않았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그는 개인적인 스캔들이 생기는 것을 무척 조심하였다. 클림트도 로댕처럼 자기의 에로틱한 성격을 신화 또는 비유로서 감추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클림트의 모델이 되겠다는 여성이 줄을 서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클림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어떠한 에로틱한 포즈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나에

 

클림트는 자기의 비전이나 자기의 작품 방법에 대하여 그다지 많은 기록을 남겨 놓지 않았다. 자기의 생각을 글로 남겨 놓은 것은 내연녀 플뢰게에게 보낸 우편엽서에 적은 것이 고작이었다. 클림트는 일기 같은 것은 아예 쓰지도 않았다. 그런 중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화상에 대한 논평’(Commentary on a non-existent self-portrait)이라는 글에서 ‘나는 자화상을 그린 일이 없다. 나는 내 자신을 그림의 주제로 삼는데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인에 대하여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그림의 주제가 될만한 특별한 사항이 없다. 나는 그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이다. 누구든지 나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 작품을 보면 된다.’고 말했다.

 

구스타브 클림트

 

클림트의 작품은 우아한 황금색을 주조로 한 여러 가지 색깔의 조화가 특징이다. 그의 작품에는 간혹 남성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유디트 I’과 ‘키스’(Der Kuss), 그리고 특히 ‘다나에’에서이다. 클림트의 그림의 가장 공통적인 테마는 남성보다 우위에 있는 여성, 즉 악처 또는 요부와 같은 여성이다. 미술평론가들은 여러 가지 폭넓은 스타일이 클림트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 미노아(고대 크레테), 고대 그리스, 비잔틴의 복합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알브레헤트 뒤러의 동판화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일본의 림파(Rimpa)학파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초기에 보여준 자연주의적 스타일을 거부하고 대신 상징주의 또는 상징적 요소를 사용하여 심리학적 아이디어를 전달코자 했으며 아울러 전통문화로부터 예술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클림트의 작품은 에곤 쉴레에게 가장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클림트는 쉴레와 함께 1917년 Kunsthalle(Hall of Art)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국내 화가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활동하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1911년 그의 ‘죽음과 삶’은 로마 세계전시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1915년 그의 어머니 안나가 세상을 떠났다. 클림트는 그로부터 3년후인 1918년 2월 6일 심장마비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클림트는 비엔나의 히칭(Hietzing)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7세기 일본 교토에서 유행한 린파(淋派: Rimpa)학파의 그림 '봄'. 작자 미상. 황금색 바탕에 꽃을 그렸다. 클림트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클림트의 작품은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값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2003년 클림트의 ‘아터제 별장’(Landhaus am Attersee)은 2천9백만불에 팔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2006년에 ‘사과나무’는3천3백만불에 팔렸으며 ‘벛나무 숲’은 4천만불에 팔렸다. 두 작품은 최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클림트의 또 다른 작품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은 뉴욕 노이에 갈레리(Neue Galerie)가 무려 1억3천5백만불에 샀다. 이것은 2006년에 피카소 의 ‘피리 부는 소년’이 1억4백만불에 팔린 것을 훨씬 상회하는 액수였다. 크리스티경매장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I'를 2006년에 8천8백만불에 팔았다. 당시 경매액수로서는 세 번째로 높은 금액이었다.

 

라울 루이즈(Raul Ruiz)가 ‘클림트’(Klimt)라는 타이틀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존 말코비치(John Malkovich)가 클림트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2006년 1월 로테르담 국제필름페스티벌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같은 달에 오스트리아 라디오방송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뉴스를 전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2차대전 당시 나치가 강탈해간 다섯 점의 클림트 작품을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유태인 가족에게 반환해야할 입장에 있다. 이들 다섯 점의 그림은 시가로 최소 1억5천만불에 해당한다.’

 

키스. 알마 쉰들러(후에 말러의 부인)가 클림트에게 키스한 것을 잊지 못하여 제작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