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구스타브 클림트(Gustave Klimt) - 1

정준극 2009. 6. 17. 22:51

구스타브 클림트(Gustave Klimt) - 1

 

[클림트의 성장과정]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상징주의 화가이며 비엔나 아르 누보(비엔나 제체시온)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멤버였다. 그는 회화, 벽화, 스케치, 기타 아트 오브제를 남겼다. 대부분 그의 아트 오브제는 비엔나 제체시온 건물에 전시되어 있다. 클림트의 기본적인 주제는 여성의 신체이다. 그의 작품은 솔직한 에로티시즘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사랑을 받고 있는 클림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하여 두 회에 걸쳐 소개코자 한다.

 

 

클림트는 비엔나 근교의 바움가르텐(Baumgarten)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 치하에서였다. 클림트는 3남 4녀중 둘째였다. 그의 아버지인 에른스트 클림트(Ernst Klimt)는 원래 보헤미아 출신으로 금세공 장인이었다. 어머니의 결혼전 이름은 안나 핀스터(Anna Finster)로서 연극과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뮤지컬 배우가 되고자 했으나 결혼으로 실현하지는 못했다. 클림트는 어린 시절을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보헤미아에서 온 가족으로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876년, 클림트는 비엔나예술공예학교(Kunstgewerbeschule)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1883년까지 회화, 소묘 등을 공부했다. 학생시절, 그는 역사화가인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클림트는 한때 건축화가가 되려고 생각했었다. 1877년 클림트의 형인 에른스트(아버지의 이름과 같음)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세공 기술자가 되기 위해 비엔나예술공예학교에 입학하였다. 두 형제와 친구인 프란츠 마츄(Franz Matsch)는 함께 공부하며 함께 작업하였다. 이들은 비록 학생신분이었지만 금세공과 같은 주문이 계속 들어왔다. 클림트의 작품에 황금색갈이 많이 사용되는 것은 금세공에 대한 내력과 무관하지 않다. 세 사람은 스스로를 ‘예술가 동아리’(Company of Artists)라고 불렀다. 학교를 나온 클림트는 곧이어 링슈트라쎄에 있는 건물들의 실내 벽화와 천정화 작업을 맡게 되었다. 클림트는 1888년 링슈트라쎄의 공공건물에 대한 예술적 기여로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황금공로훈장을 받았다. 이와 함께 클림트는 비엔나대학교 및 뮌헨대학교의 명예 멤버가 되었다.

 

1892년 클림트의 아버지와 형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는 슬픈 일이 생겼다. 클림트는 나머지 식구들의 생계를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클림트는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다. 실제로 아버지의 형의 갑작스런 죽음은 클림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클림트는 새로운 예술적 비전을 탐구하게 되었다. 1890년대의 어느 해에 클림트는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라는 여성을 만났다. 클림트는 여성 관계가 복잡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뢰게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동반자로서 성실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클림트의 여성편력은 실로 대단하였다. 클림트가 플뢰게와 동반자로서 지내는 기간에 그는 최소한 14명의 자녀를 가지는 놀라운 연애실력을 보였다.

 

제체시온 건물

 

[비엔나 제체시온 시절]

1897년 클림트는 비엔나 제체시온(Wiener Sezession)의 창설 멤버로서 회장을 지냈으며 제체시온에서 발간하는 Ver Sacrum(성스러운 봄)의 편집장도 맡았다. 클림트는 1908년까지 제체시온에 머물렀다. 제체시온의 사업은 젊고 유능한 작가, 특히 기존의 고전적 화풍에서 벗어나 독일의 유겐트스틸과 같은 아르 누보 스타일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전시 공간을 제공하는 것, 외국의 새로운 사조를 소개하는 것, 그리고 제체시온 회원들의 작품을 기관지인 Ver Sacrum을 통하여 소개하는 것 등이었다. 제체시온은 아르 누보를 지향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특정한 사조나 주의(이즘)를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자연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등이 혼재하는 그룹이 되었다. 정부는 이들의 노력을 지원하였고 이들이 전시장을 가질수 있도록 부지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칼스플라츠에서 가까운 곳에 황금 면류관의 제체시온 건물이 완성되었다.

 

1890년대에 클림트는 여친인 플뢰게의 가족과 함께 아터제(Attersee) 호반에서 여름 휴가를 즐겼다. 이 시기에 클림트는 많은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클림트는 주로 인물을 대상으로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아터제에서의 풍경화는 클림트 작품의 또 다른 장르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풍경화 역시 인물화와 마찬가지로 정교한 설계와 강렬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아터제의 풍경화는 대단히 세밀한 부분까지 빠지지 않고 표현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클림트가 망원경을 보고 풍경화를 그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캄머궁 공원의 길(Avenue in Schloss Kammer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