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

정준극 2009. 6. 21. 21:46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

 

 

모리츠 폰 슈빈트(1804-1871)는 비엔나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비엔나에서 지냈지만 중년 이후에는 독일에서 주로 지내며 궁성의 벽화 등을 그린 위대한 화가이다. 그는 비엔나에 있을 때 슈베르트와 친구가 되어 즐거운 생활을 했다. 그는 그 때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 놓기도 했다. 그러나 날마다 즐겁게 놀수만은 없었다. 슈빈트는 24세 때인 1828년 뮌헨으로 가서 화가 슈노르(Schnorr)등과 친분을 맺으며 지내는 한편 코르넬리우스(Cornelius)의 지도를 받아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가 처음 맡은 대작은 1834년 루드비히 왕의 새로운 궁전에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큰 찬사를 받았다. 그후로부터 슈빈트에게는 많은 주문이 들어왔다. 슈빈트는 예술전반에 걸쳐 재능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시를 지었으며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비엔나에서 슈베르트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독일 가곡에 대한 정서를 키울수 있었던 것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시인-화가라고 불렀다. 얼마후 그는 바바리아 티롤의 호헨슈봔가우(Hohenschwangau) 궁전에 ‘니벨룽의 노래’(Niebelungenlied)의 내용을 그려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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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4년부터 1847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다. 이때에는 벽화나 프레스코화 대신에 이젤 그림을 많이 그렸다. 훗날 봐르트부르크(Wartburg) 궁성의 벽화인 ‘노래 경연대외’(1846)에 대한 구상을 한 것도 이때였다. 이와 함께 괴테의 작품에 대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다시 뮌헨으로 돌아온 그는 뮌헨아카데미의 교수로서 재직하였다. 1850년대 중반에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오래동안 구상하던 봐르트부르크의 벽화를 완성하였다. 슈빈트를 치하하기 위한 음악회가 열렸다. 이때에 슈빈트는 오케스트라의 멤버로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이어 그는 그림 형제의 동화인 ‘일곱 까마귀’에 대한 연작을 구상하였다. 그러면서 루드비히 국왕의 요청으로 잠시 영국에 갔었다. 그는 영국에서 오랜 친구인 슈노르를 만나 함께 몇가지 작업을 하였다. 글라스고우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그린 것도 그때였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건강이 악화되고 또한 작품활동도 활발히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슈타츠오퍼의 회랑에 주요 음악가의 기념물을 디자인한 것은 이때였다. 나중에 코르넬리우스는 ‘여기 음악의 기쁨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슈빈트는 바바리아의 푀킹(Pöcking)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뮌헨의 구남부공동묘지(Alter Südfriedhof)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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