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

정준극 2009. 6. 23. 17:27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1805-1873)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가 아니다. 독일에서 태어났다. 한창 때에는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으며 말년에는 바덴-바덴에서 지냈다. 비엔나에는 한두번 방문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의 화가라고 주장할수 없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람치고 빈터할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엘리자베트 왕비의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가 그린 엘리자베트(씨씨) 왕비의 초상화는 여러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콜릿의 상자에서부터 CD 커버, 칼렌다, 다이어리 북, 스카프, 머그 등등 비엔나를 상징하는 관광기념품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한 빈터할터이므로 본 블로그에서 그를 소개코자 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머리핀을 꽂은 엘리자베트 왕비: 가장 유명한 작품.

 긴머리의 엘리자베트 왕비. 가장 사랑받고 있는 작품.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츠 요셉 1세 황제. 역시 가장 인기있는 작품.

 

빈터할터는 ‘검은 숲’이 있는 바덴(Baden)대공국의 멘첸슈반트(Menzenschwand: 현재는 잔크트 블라지엔[St Blasien]의 일부)라는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제들이 많았다. 모두 8남매였다. 그중에서 4명만 장성하고 다른 형제들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형제자매가 몇명 밖에 생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형제간의 우애가 아주 돈독한 집안이었다. 그중에서도 빈터할터와 나중에 역시 화가가 된 헤르만(Hermann: 1808-1891)과의 우애는 평생을 통해 특별했다. 잔크트 블라지엔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 학교를 마친 빈터할터는 13세 때인 1818년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고향 멘첸슈반트를 떠났다. 처음에는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칼 루드비히 쉴러(Karl Ludwig Schüler)의 작업장에 들어가 동판화 제작을 배웠다. 5년후 그는 뮌헨으로 나아갔다. 1825년에는 바덴대공국의 루드비히 1세로부터 학비지원을 받아 뮌헨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갈수 있었다. 빈터할터는 이곳에서 당대의 거장 페터 폰 코르넬리우스(Peter von Cornelius: 1783-1867)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빈터할터는 스승의 지나치게 학구적인 그림 작법 때문에 만족하기가 어려웠다. 빈터할터는 보다 마음에 드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마침 요셉 슈틸러(Joseph Stieler: 1781-1858)를 만나게 되었다. 슈틸러의 기법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패셔너블(멋있는) 것이었다.

 

시녀들에 둘러싸여 있는 프랑스 유제니 왕비. 빈터할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1828년 그는 칼스루에에서 바덴대공국 군주의 부인인 조피(Sophie)의 미술선생이 되었다. 이로부터 빈터할터는 유럽의 왕실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얼마후 그는 바덴대공국의 레오폴드 대공의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프랑스 화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를 만나 친분을 맺게 되었다. 바덴으로 돌아온 그는 레오폴드 대공 등의 초상화를 그려 찬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대공궁정초상화가로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궁정초상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바덴에서 레오폴드 대공의 후원을 받으며 지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바덴을 떠나 프랑스로 향하였다. 1836년 그의 이탈리아 스타일의 작품인 Il dolce Farniente가 살롱에 전시되자 사람들의 종전에 볼수 없었던 편안하고 친근한 그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듬해에 내놓은 Decameron도 환영을 받았다. 두 작품은 아카데믹한 구성에서 볼때 라파엘 스타일이었다. 그해에 빈터할터는 벨기에 왕비인 오르레앙의 루이 마리(Louise Marie)를 그렸다. 초상화가로서의 경력이 화려하게 전개되는 순간이었다. 루이 마리의 초상화는 그의 어머니인 프랑스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의 관심을 끌었다. 얼마후 빈터할터는 프랑스 국왕 루이-필립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빈터할터의 이름은 하루아침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빈터할터는 모델의 화사한 의상과 우유 빛 살결을 잘 대조시켜서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사랑스러운 초상화를 만들어 냈다. 또한 초상화의 배경도 되도록 화려하게 꾸몄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구든지 좋아하는 초상화를 그렸다. 빈터할터에게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빈터할터의 이름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부유하게 되었다. 빈터할터는 왕족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저명인사로서 지내게 되었다.

 

                                              영국 여왕 빅토리아와 왕자

 

빈터할터가 모델로 삼은 인물 중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포함되어 있다. 빈터할터는 1842년에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그후 몇차례나 영국을 방문하면서 빅토리아 여왕, 알버트 공,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가족들의 초상화를 약 120점이나 그렸다. 이들중 상당수는 현재 버킹검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1848년에 그를 후원하던 프랑스 국왕 루이-필립이 몰락하였다. 하지만 빈터할터의 명성을 몰락하지 않았다. 스위스, 영국, 벨기에에서 빈터할터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왕실은 몰락과 성쇠를 거듭하였다. 하나의 왕조가 사라지면 다른 왕조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왕실 초상화가로서 빈터할터는 정치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다. 빈터할터는 프랑스의 루이-필립 왕조가 몰락한 직후, 잠시 동안이지만 사정상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 대신에 Florinda(플로린다)와 같은 작품들을 완성하였다. 플로린다는 스페인 전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기쁘게 표현한 것이다.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습작. 소녀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후 빈터할터의 인기는 다시 올라갔다. 빈터할터는 프랑스 궁정의 왕족들을 그리는 최고초상화가로 임명되었다. 빈터할터는 아름다운 유제니(Eugenie)왕비의 초상화를 자주 그렸다. 1855년 빈터할터는 그의 전체 작품 중에서 가장 걸작이라고 하는 ‘시녀들에 둘러싸인 유제니 왕비’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1855년 파리의 세계박람회에 전시되어 높은 찬사를 받았다. 하기야 누가 감히 왕비의 모습이 어쩌니저쩌지 하겠는가? 1852년, 빈터할터는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이사벨라 2세 여왕과 마리아-이사벨라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빈터할터는 왕족초상화 전문가로서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스페인, 벨기에, 러시아, 저 멀리 멕시코, 오스트리아, 독일 등지의 궁정에 초청되어 초상화를 그렸다. 1857년에 그린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왕비(Tsarina Maria Alexandrovna)의 초상화는 유명하다. 1860년대에 빈터할터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가 제2멕시코제국의 황제로서 멕시코로 떠나기 전에 비엔나의 초청을 받아 황제와 왕비를 그렸다. 왕비가 되는 벨기에의 샬로테는 프랑스왕비인 루이-마리의 딸이었다. 루이-마리는 일찍이 빈터할터가 초상화를 그린 일이 있다. 빈터할터가 그린 멕시코 황실 사람들의 초상화 중 상당수는 현재 멕시코시티의 국립역사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생각건대 어떠한 화가도 빈터할터처럼 각국 왕가의 유감없는 후원을 받으며 지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 있다면 루벤스와 반다이크(Van Dyck) 정도일 것이다.

 

플로린다. 왕족이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은 유일한 신화적 작품

 

빈터할터는 너무나 일이 많아서 가끔씩은 일에서 해방되어 여행을 즐겼다. 그는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래도 고국인 바덴대공국의 아름다운 산하를 잊지 못하였다. 1859년 마침내 그는 바덴-바덴에 별장을 사서 말년을 계획하였다. 빈터할터는 그동안의 작업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지만 대단히 소박하고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정한 것이었다. 그는 음식에 욕심을 내지 않고 소식하였다. 그의 작품은 평소에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지 못했다. 예쁘게 그리기 위해 가식적인 면이 담겨 있다는 비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1864년 가을, 그는 비엔나를 방문하여 프란츠 요셉 황제와 아름다운 엘리자베트 왕비의 초상화를 그렸다. 빈터할터가 그린 엘리자베트 왕비의 초상화는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프랑스와의 관계는 멀어지고 대신 고국인 독일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치료차 스위스로 떠났다가 1870년 프랑스의 제2제국이 종식되자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바덴으로 향했다. 빈터할터는 공식적으로 바덴대공국의 궁정화가 직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빈터할터는 칼스루에에 정착하였다. 1873년 여름, 그는 프랑크푸르트를 잠시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때에 뜻밖에 장질부사에 걸려 그해 7월 8일 향년 68세로 집에도 가지 못하고 객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담 바르브 드 림스키-코르사코프(Madame Barbe de Rimsky-Korsak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