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안나 말러(Anna Mahler)

정준극 2009. 6. 23. 17:46

안나 말러(Anna Mahler)

 

  

구스타브 말러와 알마 쉰들러의 딸인 안나 

 

화가이며 조각가인 안나 말러(Anna Justine Mahler: 1904-1988)의 아버지는 위대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이며 어머니는 세기적 여인인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이다. 안나의 외할아버지는 비엔나의 유명한 화가인 에밀 야콥 쉰들러(Emil Jacob Schindler)로서 그의 기념상은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에 있다. 화가와 조각가로서 안나의 미술적 재질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본다. 안나 말러는 말러와 알마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이다. 말러와 알마의 첫째 딸인 안나 마리아(Anna Maria: 1902-1907)는 일찍이 다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안나의 어릴 때 애칭은 구키(Gucki)였다. 독일어로 구켄(Gucken)은 ‘엿보다’라는 뜻이다. 안나가 유달리 푸르고 큰 눈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 말러는 안나가 불과 일곱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말러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알마는 결혼생활 때문에 제약을 받아야 했던 예술적 생활 및 감성적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알마의 가슴속에는 예술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었다. 남편 말러가 없지만 알마의 집은 언제나 비엔나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안나는 그런 복잡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나는 일견 가식적으로 보이는 사교모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도피하기 위해 16세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로 결혼을 했던것 같다.

 

               

어머니 알마 말러와 함께 (8세 때).          런던의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안나 말러

 

안나는 1920년 11월 2일 음악가인 루페르트 콜러(Rupert Koller)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결혼은 한달도 못되어 끝이 났다. 안나는 비엔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작곡가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크레네크는 나중에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의 요청에 따라 말러의 미완성교향곡인 제10번을 완성한 인물이다. 안나는 크레네크와 1924년 1월 15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결혼도 역시 실패였다. 안나는 10개월 후인 그해 11월 크레네크와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크레네크는 안나와 결혼하고 나서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작품번호 29)을 완성했다. 그러나 연주회를 열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마침 크레네크와 친분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알마 무디(Alma Moodie)가 스위스의 유력인사 베르너 라인하르트(Werner Reinhard)의 후원을 얻어 초연을 가질수 있었다. 1925년 1월 5일 데싸우(Dessau)에서였으며 연주자는 당연히 알마 무디였다. 스위스의 베르너 라인하르트는 한때 말러와 크레네크를 스위스에 함께 초청하여 한동안 지내도록 했던 사람이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의 초연이 있은지 며칠후 안나 말러와 크레네크의 공식적인 이혼수속이 완결되었다. 이혼은 가톨릭교회에서 금기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나와 크레네크의 이혼에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크레네크는 자기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초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크레네크는 알마 무디와 그렇게 그런 사이가 되어 지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으며 더구나 상당히 복잡했었다고 한다.

 

안나 말러 초상화. Bronica Koller 작. 크고 푸른 눈을 가졌기 때문에 어릴 때 애칭이 구키였다.

 

안나 말러는 1929년 12월 2일 출판가인 파울 촐네이(Paul Zsolnay)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 하나 태어났다. 1930년 태어났으며 이름은 안나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알마라고 했다. 그러나 출판가 파울 촐네이와의 결혼도 실패로 끝났다. 두 사람은 5년후인 1934년 헤어졌다. 촐네이와 결혼한지 얼마후 안나는 조각이야말로 자기의 창작력을 최대로 표현할수 있는 방안이라는 생각을 했다. 안나는 1930년 비엔나로 가서 조각 공부를 시작했다. 안나는 여류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물론 아버지 구스타브 말러와 외할아버지 에밀 야콥 쉰들어, 그리고 어머니 알마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재능은 있었다. 1937년에는 파리의 조각전에서 그랑 프리를 받기도 했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유태인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정책을 펼치자 안나도 유태계라는 이유 때문에 신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39년 안나는 가까스로 비엔나를 떠나 런던에 정착하였다. 안나는 런던에서 학생들을 받아 레슨을 하며 지냈다. 1943년 3월 3일, 안나는 런던에서 지휘자 아나톨레 피스툴라리(Anatole Fistoulari)와 결혼하였다. 네 번째 결혼이었다. 딸 마리아는 1943년 8월 1일에 태어났다.

 

 

'아름다운 비엔나 여인'에 수록된 안나 말러             안나 말러에 대한 책

  

전쟁이 끝나자 안나는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에서 여러 해를 지냈다. 1950년대 중반에 안나는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인 ‘You Bet Your Life’에 출연하였다. 이때에 안나는 지휘자 피스툴라이의 부인이면서도 할리우드의 영화감독인 알브레헤트 요셉(Albrecht Joseph)과 대단히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결국 안나는 영화감독인 알브레헤트 요셉과 1970년에 결혼하였다. 다섯 번째 남편이었다. 안나가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는 중인 1964년에 어머니인 알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알마는 나치를 피하여 세 번째 남편 베르펠과 함께 이미 전쟁중에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제 안나는 재정적으로 독립을 해야 했다. 안나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잠시 지내다가 1969년 마침내 이탈리아의 스폴레토(Spoleto)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영국의 햄스테드(Hamstead)에서 살고 있는 딸 마리나를 만나러 가서 얼마동안 지내는중 노환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향년 84세였다. 안나 말러는 영국의 하이게이트(Highgate)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안나 말러와 작품

 

안나는 다섯 번째 남편인 영화감독 요셉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나는 75세 때에 요셉과 헤어졌다. 그렇게 하는 것이 두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방에 앉아 서로 바라보기만 하면 무슨 발전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안나는 여러 점의 조각 작품을 완성하였다. 대부분 석상이었다. 그러나 동상도 제작하였다. 그중에는 20세기음악의 거장들인 아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아서 슈나벨(Arthur Schnabel),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 아일린 조이스(Eileen Joyce)등의 흉상이 있다.

 

  

자신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는 안나 말러. 오른 쪽은 잘츠부르크에서 열렸던 개인전 포스터. 여인이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