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알마 말러-베르펠(Alma Mahler-Werfel) - 1

정준극 2009. 6. 24. 20:04

알마 말러-베르펠(Alma Mahler-Werfel) - 1

그녀의 특별한 생애

 

1908년의 알마 말러

 

1902년 3월 9일, 알마 쉰들러는 위대한 작곡가 겸 비엔나 궁정오페라의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두 딸을 두었다. 큰 딸인 마리아 안나(1902-1907)는 성홍열과 장질부사로 겨우 다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딸 안나(1904-1988)는 나중에 훌륭한 조각가가 되었다. 말러는 알마와 결혼하면서 알마가 작곡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 걸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알마는 이미 여러편의 가곡을 작곡했었다. 알마는 수준급 화가이기도 했다. 알마는 말러의 결혼조건에 동조하여서 남편인 말러를 내조하고 두 딸의 어머니로서의 역할만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나 첫째 딸 마리아 안나가 죽자 알마는 크게 낙심하여 마음속에 갈등을 가지기 시작했다. 얼마후 알마는 젊은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밀회를 하기 시작했다. 말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생활의 위기를 느낀 말러는 자기가 알마에게 작곡을 그만두도록 한 것이 이유가 되어 알마가 불만의 돌파구로서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생각했다. 말러는 결혼 조건으로 내걸었던 사항을 후회하고 알마가 이미 작곡한 가곡들 중에서 일부를 공식적으로 출판키로 했다. 말러는 그렇게 하여 알마의 예술에 대한 욕구불만과 딸을 잃은 공허한 마음을 채워 줄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마의 가곡중에서 다섯 편이 1910년 발표되었다. 알마도 잠시 마음을 돌려 말러에게 충실코자 했다.

 

말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딸. 왼쪽이 일찍 세상을 떠난 마리아 안나, 오른쪽이 나중에 조각가가 된 안나 

 

그해에 말러는 뉴욕에서 지휘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말러는 알마와 함께 뉴욕을 방문하였다. 1911년 2월, 말러는 뉴욕에서 심장질환이 악화되어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실상 말러는 몇해 전에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바 있었다. 얼마후 비엔나로 돌아온 말러는 1911년 5월 급기야 세상을 떠났다. 남편 구스타브 말러의 장례식을 치룬후, 알마는 비엔나에 남아 지내기로 하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알마와 딸 안나는 말러가 궁정오페라(현재의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기 때문에 받는 연금으로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지낼수 있었다. 알마는 여행이 가고 싶으면 언제라고 갈수 있는 형편이었다. 알마는 남편에게 속박당하지 않게 되자 오래 동안 가슴 속에 담고 있던 열정을 분출할수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알마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의 구스타브 말러(32세. 1892년)

 

바람의 신부

 

알마를 연모하는 숭배자중의 한사람이 오스카 코코슈카였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알마는 청년 화가 코코슈카의 거친듯하면서도 독창적인 작품 활동에 마음이 끌렸다. 두 사람은 곧 열정적인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표현주의 화가인 코코슈카는 사실상 성질이 거칠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2년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알마는 마치 밀실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변했다. 알마는 코코슈카의 아이를 임신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임신을 했다면 틀림없이 유산이나 낙태를 시켰을 것이다. 그만큼 알마는 얼마후부터 코코슈카에 대하여 기피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코코슈카는 달랐다. 1913년 코코슈카는 자기와 알마와의 애정행위를 비유적으로 그린 Die Windsbraut(바람의 신부)를 완성하고 자기가 얼마나 알마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표현하였다.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알마 말러. 1912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차기 황제 예정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유럽은 세계 제1차 대전의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코코슈카는 입대하여 육군 장교가 되었다. 1915년 초, 코코슈카의 부대는 러시아군의 기습을 받아 대부분 포로로 잡혔으며 코코슈카는 적군의 창검에 찔려 큰 부상을 입었다. 코코슈카는 겨우 생명을 건지고 병원에 후송되었다. 이로써 알마와의 관계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코코슈카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에 알마를 잊지 못하는 심정에서 알마의 실물대 인형을 만들고 언제나 함께 지냈다. 알마의 인형은 남들이 보기에 차마 창피해서 얼굴을 돌릴 정도로 노골적인 모습이었다.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바람의 신부'

 

천사의 탄생

 

1915년이 시작되자 알마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알마는 발터 그로피우스를 어떤 온천장에서 처음 만났다. 알마가 그로피우스를 다시 만났을 때에는 아직도 전쟁 중이었고 그는 육군 중위였다. 당시 발터는 전쟁중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시체들과 돌더미 속에 깔렸다가 겨우 살아나서 베를린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베를린으로 간 알마는 발터를 간호하며 지내다가 발터가 회복되어 전선으로 다시 떠나기 이틀 전인 1916년 8월 어느 날, 두 사람만의 비밀결혼식을 올렸다. 두달 후인 10월, 알마는 딸을 낳았다. 발터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농(Man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행하게도 발터는 그를 숭모하는 어떤 사람의 영향력으로 육군보도국으로 전보되었다. 그리하여 발터는 비록 전선에 있었지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발터는 군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집에 자주 오지는 못했다. 대신, 발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휴가를 나와 알마와 어린 딸과 함께 지냈다.

 

 

발터 그로피우스와 딸 마농, 그리고 알마. 아! 행복도 잠시뿐! 인생이란 것이 원래 그런것 아니겠는가! 딸 마농은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마농은 구스타브 말러의 묘지가 있는 그린칭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나중에 엄마 알마가 세상을 떠나자 마농과 합장되었다.

 

음악가, 화가, 그리고 작가

 

남편 발터 그로피우스가 전선에 나가 있는 중에 알마는 체코 출신의 유태인 시인 겸 극작가이며 소설가이기도 한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을 우연히 만나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알마는 베르펠의 작품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베르펠을 만나게 된 것은 알마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또 다른 작가 프란츠 블라이(Franz Blei)가 주선해서였다. 두 사람은 발터가 집에 없는 것을 기회로 밀회를 시작하였다. 1917년 말에 알마는 다시 임신을 하였다. 그러던중 1918년 7월의 어느 날, 알마는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발터와 열정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때 알마는 이미 임신 7개월이었다. 그날 밤 알마는 심하게 하혈을 했다. 놀란 발터는 알마를 급히 병원으로 옮겼다. 만일 조금만 늦었더라도 생명에 지장을 받았을 정도였다. 알마는 목숨을 건졌지만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했다. 7개월 밖에 안된 남자 미숙아였다. 너무나 허약한 아이였다. 거의 생존할 가능성이 없는 처지였다. 아이는 삶을 위한 투쟁을 포기한듯 보였다. 알마는 아이에게 용기를 가지라는 뜻에서 마르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는 겨우 10개월을 버티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8월, 발터는 비로소 알마가 베르펠과 밀회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터는 딸 마농을 알마의 손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당장 이혼소송을 하지 않고 별거에 들어갔다. 발터는 그로부터 2년후인 1920년 알마와 합의 이혼하였다.

 

알마와 함께 미국에 도착하여 기자회견하는 프란츠 베르펠

 

새로운 시작: 바우하우스(Bauhaus)

 

전쟁이 끝난후 낡은 독일의 질서는 사라졌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독일의 재건을 위해 세운 새로운 학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바우하우스(Bauhaus)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 및 설계 스튜디오였다. 바우하우스는 처음에 봐이마르에 있었으나 데싸우(Dessau)로 자리를 옮겼고 결국 베를린에 정착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원칙은 모든 설계는 용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자든지 집이든지 경제적으로 대량생산 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창의적인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을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임명할수 있었다. 그중에는 칸딘스키(Kandinsky)와 파울 클레(Paul Klee)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에 의해 문을 닫게 되었지만 바우하우스가 건축예술과 디자인 분야에 끼친 영향은 몇 십년이나 계속되었다.

 

데싸우의 바우하우스 건물. 발터 그로피우스 설계

 

다시 알마가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보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오스트로-헝가리제국도 붕괴되었다. 사회는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거리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연일 전개되었다. 1918년 11월 12일, 마침내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이 오스트리아공화국을 선포하였다. 프란츠 베르펠은 혁명의 열기에 빠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함께 비엔나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들의 연설문을 작성하기에 바빴다. 주로 반제국주의적인 연설문이었다. 제국 경찰은 며칠동안 반제국적인 연설문을 쓰는 장본인을 색출하기 위해 추적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국 경찰이 베르펠을 뒤쫒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베르펠에게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알마의 남편 그로피우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로피우스는 알마의 비밀 애인이 베르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베르펠을 만나 제발 어리석은 짓은 그만하고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권고하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이렇게 좁은 것이었다.

 

프란츠 베르펠(1940) 

 

프란츠 베르펠과의 생활

 

알마는 전쟁이 끝나고 몇 년동안 비엔나에서 아주 즐거운 생활을 했다. 알마의 집은 비엔나의 저명인사들과 지식인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비엔나를 방문한 인사들도 알마의 집에 들려 담화를 나누곤 했다. 알마의 집을 방문하였던 유럽의 주요 음악가들을 보면 아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쟈코모 푸치니, 모리스 라벨 등이 있다. 모두 구스타브 말러를 추모하여서 알마의 집을 들렸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하나뿐인 딸 안나는 자기 방에서 거의 혼자 지내야 했다. 혹자는 안나가 폐쇄공포증에 걸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안나는 혼잡한 모임과는 관련이 없었다. 안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탈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집을 떠나기 위한 탈출구로 삼은 것은 결혼이었다. 안나는 1920년, 16세의 나이로 젊은 음악가인 루퍼트 콜러(Rupert Koller)와 결혼했다. 결혼은 너무 성급했었다. 1년후 안나는 콜러와 이혼하였다. 그후 안나는 베를린으로 갔다. 안나는 베를린에서 작곡가 에른스트 크레네크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이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다. 안나는 자기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예술인 것을 깨달았다. 안나는 조각가가 되어 남은 생애를 예술가로서 헌신하였다. 안나는 1988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스타브 말러의 유일한 혈육인 안나 말러. 무려 다섯번이나 결혼했다.

 

말러와 알마의 딸인 안나에 대한 얘기는 이쯤하고 다시 페르펠로 돌아가 보자. 1920년 베르펠은 아마 가장 훌륭한 표현주의 희곡이라고 할수 있는 Spiegelmensch(거울 인간)을 발표했다. 괴테의 파우스트와 비슷한 연줄이 있는 작품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첫 공연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베르펠의 ‘거울 인간’은 독일 전역에서 인기를 끌며 공연되었다. 그러나 비엔나에서는 실패였다. 1924년, 알마는 말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정리하여 Brife(편지)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가 정리하여 발간한 책이므로 말러의 개인생활을 연구할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기대했었다. 말러의 전기(傳記)를 구상하고 있는 몇몇 작가들도 이 서한집을 중요한 참고자료로 삼고자 했다. 한편, 평소 말러와 가깝게 지냈던 말러의 음악적 동료인 나탈리 바우어-레흐너(Natalie Bauer-Lechner)가 Errinerungen an Mahler(말러에 대한 회상)이라는 비망록 스타일의 책을 써서 발간한 일이 있다. ‘말러에 대한 회상’은 나탈리 바우어-레흐너가 세상을 떠난 후인 1923년에 발간되었다. 즉, 알마의 서한집이 나오기 1년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알마의 서한집과 나탈리의 회상록의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탈리의 회상록은 그가 꼼꼼하게 적어 놓은 기록에 기본을 둔 것이어서 그 내용이 아주 세밀하였다. 말러와의 대화 내용도 아주 구체적이었다. 나탈리는 말러와 자주 산책을 했었다. 나탈리는 말러와의 오랜 산책시간동안 서로 대화한 내용을 꾸준하게 정리하여 적어 놓았던 것이다. 나탈리는 여름 휴가때면 말러의 별장에 와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나탈리의 회상록은 말러가 교향곡을 작곡할 때에 어떠한 생각으로 추진하였는지 등에 대하여 배경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알마가 정리하여 출판한 '구스타브 말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  책자 표지

 

한편, 말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알마의 서한집에서 몇가지 내용이 맞지 않는 사항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말러는 편지를 자주 썼다. 특히 집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지휘할 때에는 하루에도 두 번이나 세 번씩 알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말러는 이상하게도 편지에 날짜는 거의 적지 않았다. 그런 편지들은 거의 모두 나중에 알마가 기억을 되살려서 또는 일기를 보고 날짜를 적어 넣었다. 그러다보니 날짜를 잘못 적어 넣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래서 말러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혼란을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보다도 알마가 말러의 편지 내용을 자기에게 호의적인 내용으로 수정했다는 데에 있었다.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말러 연구가들의 몫이 되었다.

 

1927년 비엔나 거리에서는 또다시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그해 연초에 샤텐도르프(Schattendorf) 마을에서 라이발 정치 그룹간에 충돌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어떤 불구자 노인과 어린 아이가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인하여 비엔나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살인혐의가 있던 측이 무죄로 판결이 났다. 이에 반발하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판결에 반대하여 시내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이며 국회의사당 뒤편에 있는 대법원 건물에 방화했다.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시위대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약 90명이 피살되었고 수천명이 부상을 입었다. 비엔나는 그러한 혼란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