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알마 말러-베르펠(Alma Mahler-Werfel) - 2

정준극 2009. 6. 24. 20:07

알마 말러-베르펠(Alma Mahler-Werfel) - 2

그녀의 특별한 인생

 

말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과 함께(1912) 

 

결혼

알마는 1929년 7월 6일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프란츠 베르펠은 거의 10년동안 알마의 파트너였다. 생긴 것은 그저 그런 베르펠에게 알마를 꼼짝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으니 남녀간의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알마가 말러와 결혼할 때에는 말러가 거의 20년이나 연상이었다. 그러나 베르펠과 결혼할 때에는 알마가 50세였고 베르펠은 39세였다. 알마는 비엔나 시내에 아파트를 갖고 있었고 베니스에도 작은 집이 있었으며 남부 오스트리아 알프스 자락의 젬머링(Semmering)에 여름별장이 있었다. 젬머링의 여름별장은 알마가 코코슈카와 뜨거운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산 것이었다. 1931년, 사람들은 알마와 베르펠에게 현재의 비엔나 아파트가 협소하므로 큰 집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호에 봐르테(Hohe Warte)에 있는 큰 저택을 구입하였다. 알마의 친정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알마의 친정집은 알마가 말러를 처음 만난 집이었다.

 

가을이 아름다운 젬머링. 알마는 코코슈카와의 밀회를 위해 이곳에 집까지 구해놓았다. 어느 집인지는 비밀.

 

베르펠은 글을 쓸때에 혼자 있어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때는 호텔에 머물면서 글을 썼다. 글을 쓰기 위해 혼자서 여행도 다녔다. 1933년 베르펠은 이탈리아의 산타 마르게리타(Santa Margherita)에 있는 호텔 임페리얼에 묵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인 Die Vierzig Tage des Musa Dagh(무사 다그의 40일)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 역사소설은 1915년 터키가 무사 다그라는 산악지대에 있는 평화로운 아르메니아 마을을 인종청소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완전히 살해하려던 음모를 그린 것이었다. 소설이 나오자 국제사회는 터키의 음모를 비난하였다.

 

 

알마와 베르펠과 베르펠의 아버지, 어머니(베니스에서)

 

한편, 1930년대에 들어와서 독일에서는 나치가 서서히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알마는 과거에도 유태인(말러)의 부인이었고 현재에도 유태인(베르펠)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앞날의 안전을 위해서 어떤 방책을 강구해야 했다. 1932년, 알마는 자기가 유태인과는 관계가 없는 가톨릭임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가톨릭교회의 행사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때에 알마는 가톨릭 신부이며 신학교수인 37세의 요한네스 홀른슈타이너(Johannes Hollnsteiner)와 가까워졌다. 이렇게 하여 알마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물의를 일으킨 가톨릭 신부와의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알마는 젊은 신부와의 밀회를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작은 집을 구해 놓기까지 했다. 나중에 알마의 딸인 안나는 회고록을 통하여 자기와 수양아버지인 베르펠은 알마와 성당신부와의 밀회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안나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놀랍기까지 했던 것은 베르펠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채 무시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베르펠이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은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박해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웬만해선 입조심, 몸조심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치는 특히 유태인들의 작품을 ‘퇴폐작품’(Degenerate works)으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음악가, 화가, 작가들을 박해하였다. 말러를 비롯하여 베르펠의 작품들이 이에 속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 시절의 알마

 

천사의 죽음

1934년 4월, 비극이 다시한번 알마를 찾아왔다. 알마와 발터 그로피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딸 마농이 병에 걸린 것이다. 그때 알마는 마농과 함께 베니스에 있었다. 마농은 처음에 심한 두통만을 호소하였다. 의사가 달려왔다. 의사는 급성 척수염이라고 진단했다. 소아마비였다. 알마는 마농을 간호하기 위해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후 알마는 12개월동안 마농의 병상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간호하였다. 1935년 부활절을 막 지난 월요일에 마농 그로피우스는 숨을 거두었다. 그때 마농은 18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마농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아가씨였다.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알마의 가까운 친구인 작곡가 알반 베르크(Alban Berg)는 마농의 죽음을 크게 애도하여 ‘천사를 애도하며’(To the Memory of an Angel)라는 부제를 붙인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여 헌정했다. 운명의 손길은 알반 베르크에게도 다가왔다. 알반 베르크는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알반 베르크는 오페라 Lulu(룰루)를 작곡하고 있었지만 마농을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는 바람에 결국 룰루는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채 세상을 떠났다. 마농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알마는 마농의 질환이 시작되었던 베니스의 집을 팔았으며 2년후에는 호에 봐르테의 저택도 처분했다.

 

마농에게 헌정하기 위해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알반 베르크(유화)

 

비엔나를 떠나서

1938년이 되었다. 알마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비엔나’가 신흥 나치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알마는 신임 수상인 슈슈니그(Schuschnigg)가 난국을 헤쳐나갈것으로 믿었으며 이탈리아의 무쏠리니도 도와줄것으로 생각했다. 1938년 2월, 알마와 베르펠은 나폴리에 있었다. 며칠후인 3월 초순, 히틀러는 기어코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하였다. 알마는 너무나 급작스런 사태의 진전에 당황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비엔나로 급히 돌아와 은행의 잔고를 정리하고 비엔나를 아주 떠날 생각을 가졌다. 알마는 은행에서 찾은 돈을 몰래 외국으로 반출할 계획까지 꾸몄었다. 그러나 국경에서의 검문은 말할수 없이 철저했다. 알마와 안나는 옷가지와 몇가지 소지품만 가지고 겨우 프라하행 기차를 탈수 있었다. 당시 베르펠은 밀라노에서 알마와 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태인인 베르펠은 감히 비엔나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알마와 안나는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와 자그레브를 거쳐 트리에스테에 도착할수 있었다. 알마는 취리히에 있는 베르펠의 누이 집으로 가서 베르펠과 합류한후 파리로 갔다.

 

알마는 어려운 중에서도 말러에 관한 비망록과 악보 등을 가방에 챙겨 넣고 파리까지 왔다. 그중에서 비망록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어떤 출판사에게 의뢰하여 출판토록 했다. 말러의 비망록은 1940년 Gustav Mahler: Erinnerungen und Brief(구스타브 말러: 회상과 서한)이라는 제목으로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되었고 1946년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어판이 출판되었다. 이 회고록도 지난번 알마가 냈던 서한집과 마찬가지로 여러 오류가 있었다. 알마는 자기에 대한 묘사를 자기가 바라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한편, 1939년 11월, 알마의 친정어머니인 안나 폰 베르겐(Anna von Bergen)이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해 여름부터 알마의 남편인 베르펠은 심장마비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친 흡연이 이유였다.

 

올리버 힘즈가 지은 '망상속의 미망인-알마 말러-베르펠의 생애' 표지 

 

미국으로의 도피

유럽에서의 2차대전은 1940년 늦은 봄부터 본격화되었다. 1940년 6월 14일, 마침내 나치는 파리를 점령하였다. 파리에 있던 알마와 베르펠은 보르도(Bordeaux)로 갔다. 두 사람은 보르도에서 스페인으로 쉽게 건너갈수 있다고 생각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동안 두 사람은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위해 마르세이유, 나르본느(Narbonne), 카르카쏜느(Carcassonne), 보르도, 비아리츠(Biarritz), 파우(Pau), 루르데(Lourdes), 그리고 다시 마르세이유를 전전하면서 기회를 엿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루르데 마을은 나중에 베르펠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준 곳이기도 했다. 이들은 손에 들수 있는 가방만을 든채 오로지 스페인으로 들어갈수 있는 비자를 받기 위해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마침 마르세이유에서 미국인 언론인인 바리안 프라이(Varian Fry)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프라이는 사립기관인 미국의 ‘비상구출위원회’(Emergency Rescue Committee)를 대표하여 마르세이유에 와서 있었다. 나치가 지식인과 예술가를 박해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들을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프랑스에 왔던 것이다. 바리안 프라이의 유태인 구출활동은 Varian's War(더러운 전쟁)이라는 타이틀로 영화로 만들어져 감동을 준바 있다. 리암 니슨이 주역을 맡은 영화이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베르펠 묘비

 

마르세이유에 있던 10 여명의 유태인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바리안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미국행 비자를 받을수 있었다. 바리안은 이들을 인솔하여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간후 미국행 배를 탈 계획이었다. 문제는 마르세이유에서 리스본까지 무사히 가는 일이었다. 모두들 가방만을 들고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걸어 넘어가서 스페인으로 가는 강행군의 길을 떠났다. 도중에 프랑스 경찰이나 나치에게 발각되면 그대로 강제수용소행이었기 때문에 죽음과 삶을 건너는 아슬아슬한 도피였다. 더구나 베르펠은 심장이 약하여서 도저히 높은 산악지대를 걸어서 갈 형편이 안되었다. 알마가 베르펠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천우신조로 스페인의 국경을 건넌 이들은 바르셀로나를 거쳐 마드리드까지 간후 비행기를 타고 리스본까지 갈수 있었으며 1940년 10월 13일 알마와 베르펠 일행은 미국으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탈수 있었다. 얼마후 이들은 뉴욕에 도착하였다.

 

뉴욕에 도착한지 한두달 후인 그해 말, 알마와 베르펠은 로스앤젤레스로 자리를 옮겼다. 베르펠의 건강때문이기도 했지만 할리우드와 가깝게 있어서 여러 면에서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베르펠은 프랑스에 있을 때 루르드(Lourdes) 마을에서 들었던 베르나데트 수녀의 기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The Song of Bernadette(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다. 이 소설은 1941년에 출판되어 대단한 걸작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2년후에는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져 1943년도 오스카상의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주역인 베르나데트 수녀는 명우 제니퍼 존스(Jennifer Jones)가 맡았다. 그후 베르펠은 그의 마지막 희곡인Jacobowsky und der Oberst(야코보스스키와 대령)를 완성했다. 그러는 중에 베르펠은 계속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945년 8월 세상을 떠났다. 베르벨의 유해는 나중에 비엔나로 돌아와 중앙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베르펠이 세상을 떠난후 알마는 캘리포니아의 유럽 이민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비엔나와 뉴욕에서와 같은 생활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알마와 베르펠(뉴욕에서) 

 

전쟁이 끝난후인 1946년 알마는 미국시민이 되었다. 이듬해인 1947년 알마는 지난날 모든 추억이 깃들어 있는 비엔나를 찾아갔다. 그러나 비엔나는 아직도 전쟁으로 인한 잿더미 그대로였고 무엇 하나 예전처럼 기대할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알마는 1952년 마침내 캘리포니아를 정리하고 뉴욕에 정착하였다. 알마는 뉴욕에서 여러 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레오나드 번슈타인은 말러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번슈타인은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말러, 또는 알반 베르크를 만나 본일이 없었다. 번슈타인은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면서 알마를 통하여 작곡가와의 ‘생생한 연계'를 가지고자 했다. 실제로 알마는 번슈타인의 리허설에 여러번 참석하고 조언을 하였다. 1958년 알마의 또 다른 비망록인 And the Bridge is Love(그리고 건너는 다리는 사랑)가 출판되었다. 알마는 1964년 12월 11일 뉴욕에서 심장마비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였다. 알마의 마지막 안식처는 비엔나였다. 그린칭 공동묘지에 있는 첫 남편 말러의 묘지에서 가까운 곳에 안장되었다. 18세의 나이로 젊음을 마감한 딸 마농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뮤즈 또는 괴물?(Muse or Monster?)

알마 마리아 쉰들러 말러-그로피우스-베르펠! 이름만큼이나 복잡한 인생을 살았던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인가? 젊은 시절 알마는 뛰어나게 아름답고 타고난 지성을 가진 여인이었다. 알마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남성들이 언제나 알마의 주변에 서성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알마는 남자를 선택할 때에 그는 자기의 십대 시절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알마는 언제나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기를 원했다. 젊은 여인으로서 알마는 20세 연상의 말러와 결혼하기 전에 화가인 구스타브 클림트, 극장감독인 막스 버카르트(Max Burckhard), 작곡가인 일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등과 염문을 뿌렸다. 그의 생애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중의 하나는 그가 반유태주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비엔나에 만연하였던 하나의 사회정서였기 때문에 그에 동화되었는지도 모른다. 말러만 하더라도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집요할 정도의 공격을 받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알마의 친정인 쉰들러 집안에서도 반유태 정서가 없었다고는 할수 없다. 말러가 알마와 결혼할 때에 말러는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였다. 그렇지 않다면 비엔나궁정오페라(현재의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알마가 그린 자화상, 상대방 남자는 누군지 모른다.

 

알마는 딸 마농을 누구보다도 애지중지하였다. 순수 아리안인 자기와 역시 순수 아리안인 발터 그로피우스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마르틴에 대하여는 ‘퇴폐의 씨앗’(Degenerate seed)이라고 간주하여 거의 무관심할 정도였다. 마르틴은 미숙아로 태어나 10개월 후에 죽었다. 그로피우스는 알마와 베르펠의 관계에 대하여도 설마 알마가 유태인인 베르펠과 관계를 맺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물론 알마는 베르펠을 유태인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훌륭한 작가로 보고 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는 공개석상에서 유태인을 비난하는 분별없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베르펠과 그의 친구들은 알마의 돌연한 태도에 놀라기도 했다. 알마는 베르펠과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여러번 요청하였다. 하지만 베르펠은 조상으로부터의 신앙을 버릴수수 없다고 하면 알마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래도 알마의 집념은 변하지 않았다. 알마는 미국에서 베르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즉시 가톨릭 세례를 주선하려고 준비하기까지 했다.

 

젊은 시절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알마의 작곡 선생이었지만 잠시동안의 연애 상대이기도 했다.

 

알마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처음 작곡을 시도한 것이 아홉 살 때였다고 한다. 알마는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와 요셉 라보르(Josef Labor)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알마는 약 100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주로 1899-1901년에 작곡하였다. 1901년 말러와 결혼했을 때 말러는 알마가 예술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하지만 1910년 유럽의 정세가 혼돈 속으로 빠지자 말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알마의 작품을 출판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중에서 다섯곡을 출판했다. 다른 가곡들은 1915년(5곡)과 1924년(5곡)에 출판되었다. 1915년에 출판된 5편곡의 가곡은 베르펠의 시 Der Erkennende와 노발리스(Novalis), 비어바움(Bierbaum), 외멜(Oehmel)의 시에 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알마의 가곡은 14편만 남아 있다. 비엔나에 두었던 악보들이 전쟁중에 손실되었던 것이다. 알마가 세상을 떠난후 말러의 생애를 조명할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알마의 역할은 점점 소멸되었다. 알마가 말러에 대한 사실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고쳐 쓴 것이 명백해 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 개인에 대한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965년 뉴욕 타임스에 알마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게재되자 시인인 톰 레러(Tom Kehrer)는 ‘알마’라는 제목의 단순한 풍자시를 썼다. 첫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머지 소절들은 별로 찬사를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The loveliest girl in Vienna

Was Alma, the smartest as well.

Once you picked her up on your antenna,

You'd never be free of her spell.

(비엔나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알마,

가장 스마트하기도 하지요.

한번 그대의 안테나에 그녀를 포착하면

그녀의 마력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지요.)

 

    

알마의 가곡집 표지                                            알마의 가곡집 음반(소프라노 Ruth Zeisak, 메조소프라노

알마 마리아 쉰들러-말러라는 이름을                  Iris Vermillion, 테너 Christian Elsner 취입). 표지 그림은

사용했다.                                                           클림트.

 

알마는 살아있고

1996년에 비엔나의 극장에서는 특별한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연극의 타이틀은 ‘알마’였다. 이스라엘 작가인 조슈아 소볼(Joshua Sobol)이 극본을 쓰고 오스트리아의 무대감독인 파울루스 만커(Paulus Manker)가 연출한 폴리드라마(Polydrama)였다. 3시간에 걸친 연극은 극장의 각각 다른 층에 있는 각각 다른 공연장에서 동시에 공연되었다. 관중들은 각 공연장에서 알마의 각각 다른 생애가 펼쳐질 때마다 공연장을 옮겨 다니며 관람하였다. 이쪽 공연장에서는 말러와의 사랑이야기가 전개되었고 저쪽 공연장에서는 그로피우스와의 연애가 전개되었다. 관중들은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구성해야 했다. 구스타브 말러가 세상을 떠난 후의 휴게시간에 관중들은 알마 시대의 오스트리아 음식과 오스트리아 와인이 차려진 뷔페로 안내되었다. 비엔나에서만 140회의 연속 공연이 있었다. 2002년에는 베니스에서 공연되었고 그후에는 리스본,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다시 비엔나과 젬머링에서 공연되었다. 모든 곳이 알마와 관련이 있는 장소였다. 2001년에는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를 타이틀로 삼은 영화가 개봉되었다. 사라 윈터(Sarah Wynter)가 알마역을 맡았다. 마틴 셔빈(Martin Chervin)은 주인공 여인 한사람만이 출연하는 희곡을 썼다. Myself, Alma Mahler(나 자신, 알마 말러)라는 타이틀이었다. 1998년에는 알마의 일기에서 주요 내용만을 발췌하여 책으로 발간되었다. 1898년부터 1902년 말러와 결혼할 때까지의 이야기였다. 2001년에는 막스 필립스(Max Phillips)가 The Artist's Wife(예술가의 아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알마의 복잡한 생활을 그린 책이었다. 알마의 서류와 서한들은 미국 펜실바니아대학교와 비엔나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영화 '바람의 신부' DVD 커버. 클림트의 그림을 보는듯 하다. 알마역은 사라 윈터.



  

'바람의 신부'에서 알마 역의 사라 윈터(Sarah Wynter)와 클림트 역의 조나탄 프라이스(Johnathann Price).  코코슈카 역의 빈센트 페레즈(Vincent Perez)

 

소송문제

비엔나의 어떤 유태인 가정이 소유하고 있던 그림을 나치가 몰수해 갔다고 한다. 실은 강제로 팔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전쟁이 끝나자 그 유태인은 문제의 그림이 강탈당한 것이므로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림의 작가는 오스카 코코슈카였다. 코코슈카는 그다지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다. 다만, 그림에 등장한 여인이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였기 때문에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그림은 말러가 세상을 떠난지 2년후에 그려진 것으로 알마가 두 번째 남편인 발터 그로피우스, 일명 바우하우스(Bauhaus) 사람과 결혼하기 전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알마는 말러와 결혼생활을 하는 중에 이미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밀회를 하고 있었다. 알마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하고 나서 곧이어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알마는 결국 베르펠과 결혼하였다. 세 번째 남편인 베르펠은 유태인이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후에 알마와 베르펠은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얼마후 프랑스가 나치의 손에 떨어지자 두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갈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베르펠의 가족들은 두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코코슈카의 그림이 나치에게 강탈당한 것이므로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2009년 현재 재판은 진행중이다. 하지만 베르펠쪽이 유리한 입장이라고 한다. 만일 그 그림이 베르펠의 가족에게 돌아간다면 커다란 부를 거머쥐게 된다. 그림 값이 무려 1억6천만불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알마의 누드를 처음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