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
그의 테마는 죽음, 고통, 절망
각본가이며 소설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의 테마는 죽음, 고통, 절망이다. 그의 생에는 고독과 질병과 고통과 절망의 연속이었다. 그는 탄생부터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베른하르트는 네덜란드의 헤를렌(Heerlen)에서 태어났다. 목수였던 알로이스 추커슈태터(Alois Zuckerstätter: 1905-1940)와 헤르타 화브얀(Herta Fabjan: 1904-1950)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베른하르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비엔나에 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얼마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잘츠부르크 인근의 제키르헨(Seekirchen)이라는 마을로 이사 가야 했기 때문에 함께 가서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는 바람에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트라운슈타인(Traunstein)이라는 마을로 가게 되었다. 베른하르트가 다섯 살 때였다. 베른하르트라는 이름은 의붓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베른하르트가 태어난 네더란드의 헤를렌에 있는 그리스도 상.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베른하르트의 외할아버지인 요한네스 프로임비흘러(Johannes Freumbichler)는 작가였다. 딸 헤르타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낳은 아들 베른하르트를 무척 귀여워했다. 외할아버지는 베른하르트가 예술적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음악교육도 받도록 했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베른하르트를 어머니의 품에서 데려와 제키르헤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했으며 나중에는 잘츠부크의 고등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외할아버지의 정성어린 보살핌이 없었다면 베른하르트는 훗날 유명한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베른하르트는 항상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당장 돈벌이를 해서라도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베른하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식료품상점의 점원으로 취직했다.
베른하르트는 귀중한 청년시절을 당시로서는 불치병이라고 하는 폐병과 싸우면서 지내야 했다. 그는 1949년부터 2년동안 정신병원과 같은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병세는 호전되어 퇴원하게 되었다. 베른하르트는 요양소에 있으면서 거의 매일같이 폐병환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베른하르트는 절망에 빠져 한때는 자살할 생각까지 했었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그는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었던 성악가가 되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트테움(Mozarteum)의 문을 쿵쿵 두드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폐가 좋지 않아서 성악가가 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베른하르트는 방향을 바꾸어 연극배우가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나마도 쉽지는 않았다. 베른하르트는 결국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은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은 일, 그로 인하여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일 등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죽음과 고통과 절망이 넘치도록 담겨 있다. 그의 희곡을 보면 전형적으로 출연자 혼자서 독백을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독백으로 끝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중들은 마치 무대 위에서의 독백을 자기 자신들의 독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베른하르트가 내세우고 있는 견해는 죽음이란 것이 생존의 궁극적인 에센스일뿐 다른 어느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삶을 포기한 청년들이 베른하르트의 견해에 동조하였음은 물론이었다.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풍조였다. 당국은 베른하르트의 작품에 대하여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었다.
베른하르트는 1989년 향년 58세로서 북부 오스트리아의 그문덴(Gmunden)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발표되었다. 만일 그대로 발표했더라면 여러 사람들이 따라 죽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 미발표 작품은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할수 없도록 금지되었다. 연극의 경우에도 새로운 작품은 공연할수 없도록 조치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를 Nestbeschmutzer(네스트베슈무처)라고 비난했다. ‘자기의 둥지를 더럽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그의 작품이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잘츠부르크 인근의 올스도르프-오버나탈(Ohlsdorf-Obernatha) 2번지에 있는 그의 저택은 베른하르트를 기념하는 박물관 겸 그의 작품을 연구하고 공연하는 센터로서 활용되고 있다. 베른하르트는 이 저택에서 1965부터 살았다.
베른하르트의 인생의 반려자(Lebensmensch)는 헤드비히 스타비아니체크(Hedwig Stavianicek: 1895-1984)라는 여인이었다. 베른하르트보다 무려 36년이나 위였다. 베른하르트는 헤드비히를 1950년에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남녀처럼 사랑을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의하면 베른하르트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무성(asexual)의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헤드비히와 이성으로서의 관계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가톨릭 사상에 따르면 죄악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베른하르트는 어머니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헤드비히에게 대단히 헌신적이었다. 헤드비히가 1984년에 세상을 떠날 때에 마지막까지 곁에서 지켜주고 돌보아 준 사람은 베른하르트뿐이었다. 바로 그 해에 베른하르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베른하르트가 존경하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베른하르트는 헤드비히를 간호하느라고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장례식도 소홀하게 보냈다. 헤드비히는 베른하르트의 작가 생활을 가장 열심히 지원해준 사람이었다.
베른하르트는 자기 소설의 주인공들을 가이스테스멘센(Geistesmenschen)이라고 부른다. 영혼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간혹 학자들도 주인공이 된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긴 논쟁을 통하여 오스트리아와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공공연히 비난한다. 주인공들은 오스트리아를 지도한다는 인간들이 모두 오만무례하며 모욕적인 언동을 일삼는 ‘어리석은 군상’들이라고 말한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를 ‘가톨릭-국가-사회주의자’(Catholic-National-Socialist)라고 부르며 비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한 문화예술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비엔나의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를 비난하여 그곳과 연계되어 있는 예술인까지 비난하였다. 또한 그의 작품은 이룰수 없는 완전함을 위해 계속 노력하는 사람들의 고독과 자기파괴를 다루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완전함이란 정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죽음을 의미했다.
비엔나 그린칭 공동묘지의 베른하르트 묘지
그는 1968년 오스트리아정부로부터 공로패를 받을 때에 ‘사람이 죽음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웃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을 웃기는 짓,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한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이 말 때문에 그는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인 Holzfällen(1984)은 그의 친구였던 사람을 명예훼손한 내용이어서 몇 년동안 출판되지 못하였다. 그의 희곡들, 특히 Heldenplatz(영웅광장: 1988)은 오스트리아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라고 하여 보수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eldenplatz를 비롯해서 그의 몇몇 최근 희곡들은 비엔나의 예술의 전당인 부르크테아터에서 공연되었다. 베른하르트는 죽음을 앞두고 유언에서 자기의 작품을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절대로 출판하지도 말고 무대에 올리지도 말라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른하르트의 이복동생인 피터 화브얀(Peter Fabjan)이 설립한 ‘베른하르트 재단’은 몇가지 예외를 만들었다. 필요할 경우에는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예외였다. 한편, 독일의 주르캄프(Suhrkamp) 출판사는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전속 출판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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