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홍은동 백련사(白蓮寺)

정준극 2009. 7. 1. 06:33

홍은동 백련사(白蓮寺)

 

백련사는 이름부터가 불교스럽다. 한문을 풀이하면 흰연꽃이니 불법을 표현한 단어중에 이보다 더 그럴듯한 것은 없을상 싶다. 그래서인지 백련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전국 도처에 여럿이 있다. 울산 울주에 있고 경기 가평에 있으며 강진 만덕리에 있는가하면 부산 영도구에도 있고 성남시 중원구에도 있다. 또 있다. 강북의 수유동에도 있는가하면 서대문구 홍은동에도 있다. 그중에서 서울시내에 자리 잡고 있는 홍은동의 백련사를 심방하였다. 신라천년 사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고종 소속이다. 대한불교태고종 소속으로 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일반적으로 사찰이라고하면 그윽한 산사를 연상하여 깊은 산중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요즘은 반드시 그런것도 아니다. 물론 옛날에 처음 절을 지었을 때에야 산속에 있었겠지만 지금은 동네 한가운데에 마치 주민센터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곳들이 많다. 바로 백련사도 그 범주에 속한다. 뒤편은 울창한 숲이지만 절의 바로 앞은 주택들이 골목마다 줄지어 있다. 장엄한 일주문만 없다면 여기가 동네 안인지 절간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백련사가 사바에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절앞에 있는 대규모 찜질방을 보면 잘 알수 있을 것 같다. 워낙 유명한 찜질방이어서 지방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련사는 말못할 매력이 있다. 다른 절들에 비하여 비교적 깔끔하다. 단청이 훼손되어 보기 흉한 모습도 거의 없다. 산중 곳곳에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순방하는데 심심치 않다. 그보다도 절의 뒤편은 온통 짙푸른 숲이다. 한여름에 이만큼 시원한 곳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책삼아 많이들 찾아온다. 

 

 

백련사 일주문. 삼각산정토백련사라고 적어 놓았다.

 

백련사는 신라천년고찰중의 하나이다. 서울 시내 시대에 창건한 사찰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백련사는 신라 경덕왕 시절인 서기 747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라는 분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한 것은 신라시대에는 홍은동 뿐만 아니라 홍제동 일대가 지금처럼 아파트가 들어선 복잡다단한 곳이 아니고 그야말로 호랑이라도 나올것 같은 첩첩산골이었을 터인데 무슨 마음을 먹고 이곳 삼각산 기슭까지 와서 절을 지었을까 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만한 절을 지으려면 수많은 인부가 필요했을 것인데 그 인부들은 또 어디서 조달했는가 하는 것도 궁금하다. 하지만 아무리 신라시대였다고 해도 지금의 서대문구 체육문화관이 있는 이곳에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살았으며 그리고 소문에 진표율사라는 분이 절을 짓는다고 하니까 동대문구에 사는 신라백성들까지 몰려와서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아무튼 백련사라는 아담한 천년고찰은 서대문구 홍은동의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찾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홍제역에서 내려 3번출구로 나가서 초록색 마을버스 10번을 타고 서대문체육문화관을 지나 종점에서 내리면 백련사가 지척이다.

 

일주문의 현판과 아름다운 단청

 

백련사 뒤편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다. 그 산이 삼각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백련사 입구의 커다란 일주문에는 분명히 삼각산정토백련사(三角山淨土白蓮寺)라고 적혀 있다. ‘정토’(淨土)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백련사의 오리지널 명칭이 정토사(淨土寺)였기 때문인듯 싶다. 정토라는 단어는 부처님이 계시는 청정한 도량이라는 의미이다. 신라시대에 진표율사라는 분이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명지고등학교 후문 있는 곳에 새로 절을 짓고 정토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건그렇고, 아미타경이라는 경전에 의하면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염(念)하면 극락정토에 왕생한다'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진표율사가 부처님의 정토사상을 이 땅에 널리 펴기 위해 정토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정토는 극락정토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이다. 즉, 극락이든 정토이든 모두 낙원(파라다이스)을 의미한다. 신라시대에 지었을 때에는 규모가 작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정종이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제2대 임금으로 본의 아니게 즉위한 직후 뜻한바 있어서 무학대사에게 당부하여 정토사를 확장 재건토록 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고려가 불교 때문에 피폐해진 것을 상기하여서 숭유배불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이 정토사의 중창(重創)을 지시한 것은 남다른 일이다. 왜 그랬을까?  

 

 

생전예수재의 기간이었다. 무량수전.

 

세월은 또 흘러서 수양대군이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조는 불교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세조의 큰 딸인 의숙(懿淑)공주의 남편 하성부원군 정현조(鄭顯祖)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세조는 사위가 극락에 가도록 기원하기 위해 정토사를 의숙공주의 원찰(願刹)로 정하고 절 이름을 백련사로 바꾸었다. 백련사는 임진왜란때 전쟁으로 인하여 불에 타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보라! 사부대중의 뜨거운 정성을! 백련사는 소실된지 3년만에 사부대중의 힘으로 중건되었다. 그후 여러번 중창을 거듭하였다가 비교적 최근인 1965년에 신도와 스님들이 합심하여 극락보전을 중창함으로서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사연이 있는 절이므로 한번들 가보시기 바란다.

 

무량수전의 삼존불. 그 옆에는 그랜드 피아노. 역시 현대감각의 백련사.

 신통하게도 백련사에서는 산신각, 칠성각, 관음전의 한지붕 세가족. 하지만 지나치게 고색창연하여 민망스럽다.

극락보전.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극락보전의 벽화. 중생을 용선에 태우고 극락으로 안내하는 장면. 바닷가 벼랑에는 사바세계에 있는 백성들. 

 극락보전의 삼존불과 탱화

극락보전 옆면의 극락전 현판과 부처들을 그린 벽화 

 이건 어디더라? 무량수전. 샹들리에가 화려하다.

독성각도 운치있는 건물. 근데 뭐하는 곳이더라?

 무량수전 현판과 단청

명부전의 뒤쪽 벽화. 십이지신상을 잘 그려놓았다. 

 명부전의 불상과 여러 과일, 공양미, 향촉...그리고 복전함, 그리고 휴지통.

 비석과 소각장. 소각시설의 용도가 조금 궁금했었다.

무량수전 

 약사전과 무량수전의 위용 

 범종각과 해탈루

해탈루의 목어

 

 무량수전의 천정 용두와 단청 및 발원문

약사전의 아름다움. 양측 기둥으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원통전. 뭐하는데더라? 설마 원통한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풀라는 뜻은 아니겠지...

해탈루. 저멀리 모래내 수색 쪽이 다 내려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