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탑골공원

정준극 2009. 6. 8. 23:57

탑골공원

(TapGol Park)

 

해방후의 파고다공원 

대원각사비

 

탑골공원이라고 하니까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탑골승방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김내성씨의 무슨 탐정소설 제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다고 말한다. 우선 어휘적으로 탑골이라고 하면 납골당이라는 비슷한 말을 연상하기 때문에 혹시 납골당과 관련이 있는 공원이라는 엉뚱한 우려를 갖게 한다. 납골과는 관련이 없다고 얘기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골탑, 유골처리, 인골발견, 백골부대 등등의 단어를 연상하며 약간의 기피심을 발휘한다. 사실상 우리에게는 탑골공원이라는 말 대신에 파고다공원이라는 말이 아직도 더 친숙하다. 한때는 탑공원이라고 짧게 부른 일도 있었다. 어쨋든 탑골공원이라는 명칭이 현재의 공식명칭이라고 하므로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마음 편하다. 영어로 TapGol이라고 표기한 것은 종로구 팸플릿에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옮겨본 것이다. 오히려 그냥 Pagoda Park라고 하는 것이 외국인들에게는 이해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두려워서 파고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파고다라는 이름의 담배도 나라에서 만들었는데...파고다공원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삼일운동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삼일운동의 발상지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식자는 파고다공원이 뭐냐, 삼일공원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편 일이 있다. 공원입구의 문에도 삼일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느냐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탑골공원으로 결론이 났다.

 

탑골공원 정문의 삼일문. 기왕에 공원 정문의 명칭이 삼일문이므로 이참에 삼일공원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을 듯.

유리집 안에 보존되어 잇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을 관람하고 있는 외국인들. 아무튼 유리라도 덮어 놓아야 안심이다.

 

탑골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공원 안에 탑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 세조가 세운 탑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때 배우기를 원각사 13층 석탑이라고 했는데 요즘 나온 팸플릿에는 10층 석탑이라고 적혀 있어서 과연 어떤 것이 맞는지 궁금하다. 종로구에서 발간한 팸플릿에 따르면 3층 기단위에 10층 탑신을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렇다면 10층 석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 10층 석탑은 현재 거대한 철근 유리건물 안에 모셔져 있어서 가까이서 볼수도 없을뿐만 아니라 사진 찍는 일도 아주 어렵다. 사진을 찍으면 유리에 반사되어 뭐가 무언지 모르게 나온다.

 

팔각정. 쿵짝쿵짝  브라스 밴드 소리가 울려 나올것 같다. 여기서 독립선언문이 처음으로 낭독되었다.

 

탑골공원의 또 하나 명물은 팔각정이다. 팔각정은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바꾼후 황실의 음악회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아마 옛날에는 군악대가 쿵짝쿵짝하면서 브라스 밴드를 연주했을 것인데 그런 연주회가 근년에 열렸다는 얘기는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 바라건대 음악회 장소로 세운 팔각정이라면 기왕에 취지를 살려서 종로구가 주관이 되던 서울시가 주관이 되던 브라스 밴드 연주회를 가지면 관찮은 구경꺼리가 되겠다. 물론 팔각정은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쯤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장소라고 하므로 브라스 밴드 연주회나 열면 무언지 죄송한 생각이 들것 같기도 하다.

 

공원내 옛 우물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노인분들. 그것 유적인데...각자 딴 생각. 공원 당국은 이들을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루종일 이대로 앉아 있다가 집에 갈수는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한지 만드는 작업이라도 주선 했으면 좋겠다.

 

오래전부터 탑골공원은 대한민국 노인네들의 집합소로 유명했다. 서울시내 및 경기도 거주의 노인분들은 모두 모인것 처럼 노인천국이었다. 그것이 불과 몇년전이었다. 필자가 몇년전 겨울쯤해서 그 앞을 지나가다가 들여다 본 일이 있었는데 무료급식을 받으려는 노인네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아니, 저 양반들은 자식들도 없나? 어째서 무료급식을 위해 날씨도 추운데 아침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계신가? 라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런데 며칠전 가서 보니 노인분들도 별로 많지 않았고 더구나 행색이 지나치게 초라한 분은 찾아볼수 없었다.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그런지 모두들 점잖은 옷차림들이었다. 물론 무료급식소 또는 이동다방 같은 것도 찾아 볼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지하철 종로3가 역에 내려가 보면 노인분들을 더 많이 볼수 있다.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노인분들도 더러 눈에 띤다. 재미난 현상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탑골공원의 담장 밖 옆길 골목으로 들어서면 노인들을 위한 배려가 자못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러 식당들은 노인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서 비교적 싼 값의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콩국수 1천원, 냉면 2천원, 진국 설렁탕 4천원 등이다. 식당마다 많은 노인분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탑골공원 옆 골목길의 어떤 식당. 냉면 2000원, 잔치국수 1000원, 콩국수1000원....싼게 비지떡이 되지 않도록 철저 감시를 해야 할 것이다.

 

식사를 마친 분들은 거의 모두 손에 자판기 커피 한잔씩을 들고 있다. 백원짜리 동전하나를 넣으면 자판기커피를 뽑아 마실수 있다. 자판기도 노인들을 고려하여 '순한 맛 커피'를 주로 제공하고 있다. 또 하나 유별난 것은 이발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발소마다 노인분들이 앉아서 이발을 하고 있었다. 가격은 이발 3천5백원, 염색 5천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발하는데 3천원이었는데 5백원이 올랐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웬만한 이발소에서는 이발 한번 하는데 만원 이상을 받는다. 그러므로 3천5백원은 아직 저렴한 가격이다. 머리를 감으면 5백원을 더 내야 한다. 아무튼 이발소들이 여러 군데 성업중이었다. 또 하나 흥미있는 것은 골목길에 벼룩장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 물건들을 가져와서 펼쳐놓고 파는 노인들이 많았다. 돋보기 안경, 시계, 라디오, 책, 구두, 부채 등 이런저런 물건들이 벼룩시장처럼 좁은 골목길을 차지하고 있다.

 

골목길에 자리잡고 있는 소규모 벼룩시장. 이 참에 벼룩시장을 공식으로 활성화하면 명물이 될터인데...노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이 장농에서 나올것이기 때문.

 

다시 탑골공원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삼일정신찬양비가 한쪽에 거룩하게 서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월탄 박종화 선생께서 글을 지으셨고 일중 김충현 선생께서 글씨를 썼다. 그 내용이 훌륭하고 감격스러워서 소개코자 한다. 오늘날의 젊은청년들에게 주는 간곡한 메시지이다. 아마 월탄선생께서 지금의 시대에 살아 계셨더라면 '젊은이들이여, 시청 앞이나 서울역 앞 광장에 가서 쓸데 없이 사기꾼을 위한 데모나 하지 말고 파고다공원에 와서 삼일 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고 애국하겠다는 심정을 굳건히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삼일독립찬양비

 三 一 정신 찬양비

 

젊은이들이여 보라 한국의 지성 높은 젊은이들이여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이 나라의 주춧돌인 청년학생들이여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어 고요히 주위를 살피고 둘러보라 민족자결의 고함치는 독립만세 소리 그대의 귀에 쟁쟁하리라 추상열일 같은 천고의 의기가 그대의 가슴에 용솟음치리라 아 아 젊은이들이여 이 땅을 길이길이 수호하여 자손만대에 영원히 간직하라 이곳은 一九一九년 三월 一일 그대들의 선배 젊은이들이 일인 총독의 총칼아래 희고 푸른 민족정기를 무지개 같이 창공에 뿜어 삼십삼인의 지도자와 함께 인간의 자유와 국가의 독립을 정정당당하게 선포하고 민족자결을 외쳤던 三一 민족운동의 성스러운 발상지다 자주독립을 선포한 젊은이들은 맨주먹 빈손으로 고함치며 거리로 내달렸다 남녀노소 국민들은 뒤를 받쳐 성난 물결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러 하늘땅을 뒤엎었다. 백수항전의 흰 물결 아 아 자유아니면 죽엄을 달라 민족자결의 고함소리에 백두산도 우쭐대고 동해물도 끓었어라 일경도 넋을 잃고 총독도 떨었어라 한식경 뒤에야 일경은 비로소 총칼을 들고 우리들을 쏘고 찔렀다 비웃두름 엮듯 감옥으로 묶어갔다 피흘려 쓰러진이 거리마다 즐비했다 아아 거룩한 한민족의 백수항전이여 탑골공원의 봉화가 서울 장안에 높이 들려지니 삼천리 강산 방방곡곡엔 산마다 봉화요 동리마다 불바다였다 일년을 끌어온 팔도강산의 三一 만세 대정신운동은 온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제 감옥에 투옥된이 사만육천구백여명이요 총칼에 쓰러져 죽은이 칠천오백구명이요 상한이가 일만오천구십일명이었다 아아 세계민족사상에 그 유례가 없는 일치단결된 대민족운동이요 만고에 없는 민족의 서사시다 오늘날 국가의 광복은 이 성스러운 민족운동의 결실이라하겠다 아아 젊은이들이여 이정신을 이땅과 함께 길이 간직하라 단군기원 四千三百年 十二월 박종화 짓고 김충현 쓰다.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상. 33인의 대표.

 

공원의 안쪽에는 삼일운동 기념부조가 줄지어 세워져 있다. 삼일운동 당시에 전국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과 일제의 참혹한 진압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들만 부조로 만든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소개하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에는 대표적인 사례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 만을 소개한다. 아무튼 그들의 만행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쯤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참석한 중에 독립선언서가 처음으로 크게 낭독됬다. 이로서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에 번지게 되었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일경이 만세를 부르던 우리의 부녀자들의 머리채를 말꼬리에 매어 끌고 다녔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한 교인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제암리 교회 사건은 너무나 잔혹한 것이었다. 교인들을 교회에 모이라고 해놓고 교회 문을 잠근후 불을 질러 무도 죽게 만들었다. 겨우 빠져 나온 사람은 무차별하게 총검으로 죽였으며 불타는 교회 안에서 아이만은 살리려고 창문밖으로 내보냈지만 일경은 어린 아이까지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유관순 열사의 애국하심을 잊을수는 없다. 일제의 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