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Johann Nepomuk Nestroy)
오스트리아의 셰익스피어
1801년 12월 7일 비엔나에서 태어나고 1862년 그라츠에서 세상을 떠난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는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오페라 성악가로부터 시작하여 연극배우를 거쳤고 아울러 극작가로서 활동했다. 그래서 그를 ‘오스트리아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른다. 비엔나의 지하철 U1을 타고 시내에서 도나우 강을 건너면 네스트로이플라츠(Nestroyplatz: 네스트로이광장)역이 나온다. 네스트로이가 활동했던 칼극장(Carltheater)이 있던 곳이다. 네스트로이광장의 한쪽에는 네스트로이의 기념상이 서 있다. 1976년, 도나우강을 건너 카그란(Kagran) 쪽으로 가는 다리인 라이히스브뤼케(Reichsbrücke)가 붕괴되었다. 아마 2차 대전의 여파인듯 싶었다. 새로 교량을 건설키로 했을 때 사업명을 ‘프로젝트 요한 네스트로이’로 결정했다. 따라서 새로 건설하는 교량의 명칭은 ‘요한 네스트로이 대교’가 되어야 했지만 혼돈을 주지 않기 위해 종전의 명칭인 라이히스브뤼케(제국대교)를 그대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그렇게 결정 되었다. 매년 최우수 독일어 연극에 주는 상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스위스 일부, 그리고 헝가리와 체코공화국, 슬로베니아의 일부 극장에 해당한다. 그 상의 명칭은 ‘네스트로이상’이다. 독일어극장에서의 오스카상이다. 네스트로이상 시상식은 매년 비엔나에서 개최되며 국립TV로 중계된다. 연극을 좋아하는 비엔나 사람들은 네스트로이를 그릴파르저, 라이문트와 함께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서 존경하고 있다.
비엔나의 제2구 네스트로이플라츠에 있는 요한 네스트로이 기념상
비엔나에서 태어난 네스트로이는 성악에 재능이 있어서 21세 때부터 오페라에 출연할 정도의 훌륭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30세가 되던 해까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여러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에 출연하며 나름대로 명성을 쌓았다. 그러다가 고향인 비엔나로 돌아와 연극에 출연하는 한편, 연극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무대 경험을 쌓은 것이 기본이 되어 극장스타일의 그의 극본들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네스트로이를 ‘오스트리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렀다. 1833년, 그가 32세 때에 내놓은 극본인 룸파치바가분두스(Lumpacivagabundus)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걸작이었다. 그로부터 네스트로이는 비엔나의 문화예술 사회에서 주도적인 인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네스트로이가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의 후계자로 나타났다고 하며 찬사를 보냈다. 라이문트는 당대의 배우 겸 극작가였다.
탈리스만(부적)에서 가발 장면
그러나 라이문트가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무대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데 비하여 네스트로이는 코미디와 독설과 풍자로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클레멘스 메테르니히(Clemens Metternich)수상이 독재를 하고 있었다. 메테르니히 수상은 정부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좌시하지 않고 검열과 감독으로서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네스트로이는 교묘한 대화와 말솜씨로 검열을 피하는 대본을 만들어 냈다. 과연, 네스트로이의 말재주는 가히 전설적이었다. 분명히 정부를 비꼬며 비난하는 내용이지만 꼭 집어서 그렇다고 트집을 잡기가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비엔나 언어(사투리)를 사용하여 관중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것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연설이 아니라 서민들의 언어였다. 그는 또한 연극에 음악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가미하였다. 가끔씩 노래를 삽입한 것은 스토리의 전개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이 연극에 출연할 때에는 노래 한마당이 필수였다.
네스트로이는 1840년대부터 185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80편의 코미디를 썼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앞에서 언급한 첫 히트작품인 Lumpacivagabundus(룸펜)를 비롯하여 Liebesgeshichten und Heiratssachen(사랑의 역사와 결혼 사건), Der Talismann(부적), Einen Jux will er sich machen(농담으로 웃기다)등이다. 모두들 사회적 풍자와 비평을 담은 내용이다. 그중에서 Der Talismann은 에드문트 니크(Edmund Nick)가 Titus macht Karriere(티투스의 출세)라는 타이틀의 오페레타로 작곡했다. 오늘날 네스트로이의 오리지널 연극은 반 이상이 현대 감각에 맞는 독일어로 수정 보완되었다. 그리하여 비엔나에서만 해도 시즌마다 네스트로이의 연극이 공연되지 않는 때가 없게 되었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은 거의 없다. 아마 비엔나 사투리를 영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듯 싶었다. 그러나 일단 영어로 번역된 것은 마치 뛰어난 고전처럼 인기를 끌었다. Einen Jux will er sich machen(농담)은 처음에 손턴 와일더(Thornton Wilder)가 The Matchmaker(중매장이)로 번역하였다. 이 극본은 나중에 뮤지컬 Hello, Dolly!(헬로 돌리!)가 되었다. The Matchmaker는 다시 스테픈 플레이스(Stephen Plaice)가 on the Razzle(야단법석)이라는 타이틀로 번역하였다. 오늘날 ‘야단법석’은 코믹걸작으로서 무대를 제압하고 있다. 네스트로이의 묘소는 배링(Währing)공동묘지에 있다.
프라터슈트라쎄에 있었던 칼테아터(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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