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
소설가 베르타 폰 주트너(1843-1914)는 1905년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여류이다. 여성으로서는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오스트리아 유로화에서 2유로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베르타 폰 주트너이다. 베르타 폰 주트너의 공식 풀 네임은 베르타 펠리시타스 조피 프라이프라우 폰 주트너(Bertha Felicitas Sophie Freifrau von Suttner)이다. 폰 주트너 남작부인이라고도 부르며 킨스키(Kinsky) 백작부인이라고도 부른다. 이름 중의 프라이프라우는 남작부인을 의미한다. 그는 세계적으로 열성적인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폰 주트너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란츠-요셉 그라프 킨스키 폰 브치니츠 및 테타우(Franz-Josef Graf Kinsky von Wchinitz und Tettau)라는 긴 타이틀을 가진 오스트리아 제국의 장군이었으며 어머니는 오래 동안 부유한 주트너 가정의 가정교사를 지냈던 조피 폰 쾨르너(Sophie von Körner)였다. 아버지는 비록 군대의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재물과는 거리가 멀어서 곤궁한 생활을 했다. 베르타는 아버지가 백작이었으므로 백작의 호칭을 사용할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가정교사로 있었던 주트너 가문의 아르투르 폰 주트너(Arthur von Suttner) 남작과 결혼했기 때문에 폰 주트너 남작부인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게 되었다. 남편 아르투르 역시 문인이었다. 베르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베르타와 아르투르 남작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귀족 집안의 아들로서 소설이나 쓴다고 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기가 오래 동안 가르쳤던 아이였기 때문에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약혼을 했지만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다. 베르타는 우선 집을 떠나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베르타는 파리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알프레드 노벨이 개인 비서 겸 가정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모하여 노벨의 비서 겸 가정부로 가게 되었다. 베르타는 파리로 가기 1주일 전에 아르투르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1876년 6월 12일이었다. 남편 아르투르는 1902년에 세상을 떠났다.
1905년의 베르타 폰 주트너
베르타 폰 주트너는 1889년 Die Waffen nieder!(Lay Down Your Arms: 무기를 내려놓고!)라는 소설을 발표한 것과 함께 평화운동의 주도적 인물이 되었다. 이어 그는 1891년 오스트리아평화주의자단체를 결성했다. 이듬해인 1892년에는 그의 소설 제목에서 따온 Die Waffen nieder라는 평화운동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9년까지 이 신문의 편집장으로서 활동했다. 베르타 폰 주트너의 평화운동은 헨리 토마스 버클(Henry Thomas Buckle),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챨스 다윈(Charles Darwin)의 저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베르타 폰 주트너는 비록 노벨과 함께 일한 기간이 짧았지만 노벨이 세상을 떠난 1896년까지 평생을 서신교류를 하며 지냈다. 노벨상에 평화상이 포함된 것도 실은 베르터 폰 주트너가 노벨에게 강력하게 권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덕에 한국의 김모라는 사람도 비록 돈주고 산 형국이 되었지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얘기다.
베르타 폰 주트너, 제임스 와트, 마르틴 루터, 안토니오 비발디의 모습을 넣은 유럽 기념 주화. 오른편은 오스트리아의 2유로 주화에 등장한 베르타 폰 주트너
베르타 폰 주트너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려서 노르웨이의 영화사가 Die Waffen nieder!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다. 베르타 폰 주트너는 2008년에 유럽국가들이 발행한 수집가용 동전의 배경인물 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 기념동전에는 유럽의 발전에 영향을 준 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유럽이 중세로부터 현대로 전환되는 것을 상징한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는 유럽의 예술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어서 선정되었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증기기관을 발명함으로서 유럽의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가 많아 선정되었다. 그리고 베르타 폰 주트너이다. 베르타 폰 주트너는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가장 고액지폐인 1000쉴링에 등장하였으며 현재는 2유로 주화에서 볼수 있다. 독일은 2005년도 우표에 베르타 폰 주트너를 넣어서 발행했다.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작가로서 베르타 폰 주트너를 도와 평화주의 운동을 주관하였던 알프레드 허만 프리트(Alfred Hermann Fried)는 1911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5년 독일정부가 발행한 베르타 폰 주트너 기념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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