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정준극 2009. 7. 4. 22:32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20세기 최고의 독일어 서정시인

 

파울라 모더존-베커가 그린 릴케의 초상화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가슴으로 잡을 것입니다.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럼 나의 뇌가 심장으로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르면

그때는 당신을 핏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라이나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살로메에 바치는 시’이다. 청춘의 시절에 릴케의 시를 한 줄이라도 읊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릴케의 시는 번민하는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에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비처럼 내리던 것이었다. 몇개의 소절을 회상해 보자.

 

<작별> 우리 이제 작별을 나누자 두 개의 별처럼...

<석상의 노래> 소중한 목숨을 버릴만큼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누구일까...

<고독> 고독은 비처럼 바다로부터 저녁을 향해 올라온다....

 

릴케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독일어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형언할수 없는 불신과 고독과 깊은 불안의 시대에 마음으로부터의 어려움을 함께 부담하는 것이었다. 문학평론가들은 릴케가 전통주의적 시인으로부터 현대주의적 시인으로 변천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릴케는 시도 썼지만 대단히 서정적인 산문도 썼다. 그의 대표적 시는 ‘오르페우스에 붙이는 소네트’와 두이노 엘레지(Duino Elegies)이며 대표적인 산문은 Letters to a Young Poet(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와 반자서전적 산문인 The Notebooks of Malte Laurids Brigge(말트 로리드 브리게의 노트북)이다. 그는 또한 약 4백편에 이르는 프랑스어 시를 써서 그의 제2의 고향인 스위스의 발레(Valais)지방에 헌정하였다.

 

 

그는 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르네 칼 빌헬름 요한 요셉 마리아 릴케(Rene Karl Wilhelm Johann Josef Maria Rilke)로서 태어났다. 당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하여 있었다. 보헤미아는 현재의 체코공화국이다. 프라하에서 릴케의 소년 시절은 슬픈 것이었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전역하여 철도국의 공무원으로 근무했고 어머니 조피엔츠(Sophie Entz: Phia라는 애칭)는 프라하의 상류층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프라하의 헤렌가쎄(Herrengasse)에 있는 궁전에서 살았다. 릴케도 어린 시절에 이 궁전에서 한동안 지낸 일이 있다. 릴케의 어린 시절이 비참했다는 것은 그의 위로 태어난 아기(딸)가 생후 몇주만에 세상을 떠나 그런 이유로 어머니가 깊은 상처를 입고 슬픔에 젖은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첫 딸을 잃은 다음에 태어난 릴케에게서 첫 딸의 모습을 찾으려는 듯 어린 릴케를 여자아이처럼 길렀다. 어린 릴케는 여자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았으며 여자아이의 옷을 입고 무려 5년 이상이나 지냈다. 어머니는 그런 릴케를 보고 그저 눈물을 흘렸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릴케의 어린 시절이 슬픔에 넘친 것이었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참기 어려워서 항상 의견의 충돌이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1884년, 릴케가 아홉 살 때에 헤어졌다.

 

독일의 보르프스베데(Worpswede) 예술인촌

 

릴케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인 재능이 있었으며 특히 시적인 감수성이 예민하였다. 그의 부모는 그러한 릴케를 사관학교와 같은 곳에 입학시켰다. 릴케는 11살 때부터 5년동안 엄격한 교육의 사관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병이 생겨 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공부를 하여 1895년 프라하대학교에 들어가 문학, 역사,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그후에는 뮌헨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897년, 릴케는 뮌헨에 있을 때 루 안드레아스-살로메(Lou Andreas-Salome: 1861-1937)이라는 여인을 만났다. 당시 릴케는 22세의 청년이었고 살로메는 그보다 14세가 많은 36세였다. 살로메는 제정러시아의 생페터스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뮌헨에서 릴케를 만났을 당시에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살로메는 부유한 상류층 여인으로 여행 다니기를 좋아한 지성인이었다. 살로메를 만난 릴케는 자기의 모습과 자기의 이미지가 너무 남성적이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릴케는 살로메에게 남자로서의 자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르네(Rene)라는 여성적 이름을 라이너(Rainer)라는 남성적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로부터 릴케의 이름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되었다. 릴케와 살로메의 관계는 1900년까지 3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살로메는 릴케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에도 정신적으로 후원을 계속했다. 예를 들면 살로메는 1912-13년 비엔나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문하에 들어가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자기가 취득한 지식을 릴케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릴케의 유명한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는 바로 루 안드레아스-살로메가 주인공이다.

 

루 안드레아스-살로메

 

릴케는 두 번에 걸쳐 살로메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했다. 첫 번째는 1899년으로 이때에는 살로메의 남편 프리드리히 안드레아스도 함께 갔었다. 이때 릴케는 살로메의 주선으로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를 만나 깊은 담화를 나눌수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은 1900년 5월부터 8월까지였다. 이때에는 살로메와 단 둘이서 러시아를 방문했다. 살로메는 릴케와 함께 자기의 고향인 생페터스부르크로 가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와 농민시인인 스피리돈 드로츠친(Spiridon Drozhzhin)를 만나도록 주선했다. 훗날 릴케는 ‘나의 고향은 두 곳이다. 보헤미아와 러시아이다’라고 말했다.

 

 

1900년 가을, 릴케는 살로메와 헤어지고 나서 독일에 있는 보르프스베데(Worpswede) 예술인촌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표현주의 화가인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를 만났다. 유명한 릴케의 초상화는 파울라가 그린 것이다. 릴케는 이곳에서 조각가인 클라라 베스트호프(Clara Westhoff: 1878-1954)도 만났다. 릴케는 이듬해 봄에 클라라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딸인 루트(Ruth: 1901-1972)는 1901년 12월에 태어났다. 하지만 방랑벽이 있는 릴케는 이듬해인 1902년 클라라와 헤어져 무조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릴케는 프랑스의 거장 조각가 오거스트 로댕(August Rodin)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파리로 갔다. 릴케와 클라라는 별거에 들어갔지만 그들의 관계는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릴케는 파리에서 사고의 혼돈을 겪었으나 모더니즘에 고취된 이후부터는 사뭇 적극적이 되었다. 그는 로댕이나 세잔느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예술감각에 대한 폭을 넓혔다. 릴케는 한동안 로댕의 조수로서 조각의 스케치를 하는 일도 했다. 로댕은 릴케에게 사물을 보는 감각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릴케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발료한 시작(詩作)은 Neue Gedichte(새로운 시: 1907), Der Neuen Gedichte Anderer Teil(새로운 시의 또 다른 부분: 1908), 그리고 두편의 Requiem(진혼곡:1909)이다. 소설 ‘말트 로리드 브릭의 비망록’(The Notebooks of Malte Laurids Brigge)도 이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화가인 파울라 모더존-베커. 릴케의 초상화를 그렸다.       조각가인 클라라 베스트호프

 

1911-1912년간 릴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인 트리에스테 인근의 두이노(Duino)성에서 지냈다. 마리백작부인의 저택이었다. 릴케는 이곳에서 연작시인 Duino Elegies(두이노 비가)를 착수했으나 여러 가지 난관으로 오래 동안 완성하지 못했다. 우선 1914년에 세계1차대전이 일어났다. 그때 릴케는 독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파리로 돌아갈수 없었다. 파리에는 릴케의 소유들이 있었으나 모두 프랑스에 압류되어 경매에 처해졌다. 그는 전쟁기간중 주로 뮌헨에 머물렀다. 한편, 그는 뮌헨에 있으면서 화가인 루 알베르-라사르(Lou Albert-Lasard)와 마치 회오리바람과 같은 어페어를 가졌다. 1916년 릴케는 오스트리아 당국으로부터 징집되어 군대에 들어가야 했다. 그의 친구들이 여러 모로 힘을 써서 전선에는 가지 않고 대신 전쟁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몇 달후 제대하였다. 그렇지만 릴케는 비록 몇 달 동안의 군대 생활이었지만 군대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어릴때 사관학교에 다니면서 경직되고 고된 생활을 잊지 못하고 있는 릴케로서는 또 다시 경직된 군대생활로 더욱 말수를 줄이게 되었다.

 

트리에스테 인근의 두이노. 릴케는 이곳에서 두이노 엘레지를 썼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 릴케는 전후의 혼돈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스위스로 가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발레(Valais)산맥에 가까운 바이라스(Veyras) 지역의 샤토 드 무조(Chateau de Muzot)라는 곳에 정착할수 있었다. 이곳에 있을 때가 가장 창작력이 왕성한 때였다. 릴케는 Duino Elegies를 이곳에서 완성했다. 이후 ‘오르페우스에게 붙이는 소네트’를 쓰기 시작했다. 전부 55편의 소네트(Sonnet: 14행의 단편시)로 구성된 대작이었다. 릴케가 머물고 있던 집은 릴케의 후원자인 베르너 라인하르트(Werner Reinhart) 소유의 저택이었다. 라인하르트는 릴케의 시작을 위해 이 집을 개축하여 무료로 사용토록 했다. 1923년부터 릴케는 건강 문제로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는 정신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제네바 호반의 몽트로(Montreux) 부근에 있는 테리테트(Territet)정신병원에 가서 상당히 오래 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다. 1925년에는 파리에 가서 비교적 오래 동안 머물렀다. 장소와 분위기를 바꾸면 병세가 호전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중에 훌륭한 시들이 탄생하였다. 프랑스어로 된 시들도 이때에 완성된 것이다.

릴케의 병명은 그가 숨을 거두기 얼마 전에야 밝혀졌다. 백혈병이었다. 시인은 1926년 12월 29일 추운 겨울 날씨에 스위스의 발몽(Valmont)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1927년 1월 2일 스위스의 라롱(Raron)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릴케는 자기의 죽음이 얼마전 장미 가시에 찔린 일 때문에 독이 혈관에 퍼져 야기된 것이라고 믿었다. 릴케는 자기의 비명을 직접 써놓았다. 다음과 같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Rose, oh pure contradiction,

joy of being No-one's sleep, under so many lids)

 

이 비명(碑銘)에서 장미는 잠을 상징하고 있다. 장미 꽃잎들은 감은 눈의 눈꺼풀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장미의 꽃잎들은 언제나 느낄수 있는 감각으로서 장미꽃의 색깔, 향기, 연약성을 연상케 해준다. 릴케의 1898년 시 ‘그리스도의 비전’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아이의 어머니로 그리고 있다. 수잰 하스킨스(Susan Haskin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릴케는 그리스도를 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완전히 인간이며 갈보리를 통하여 신격화되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내용은 1893년에 쓴 미완성 시에 들어 있다. 그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전히 인간적이라고 믿었다.

 

스위스의 라롱에 있는 릴케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