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
‘베르나데트의 노래’의 저자
말러의 부인이었던 알마와 결혼
프란츠 베르펠
프란츠 베르펠(1890-1945)은 오스트리아-보헤미아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시인으로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유태인 지식인 중의 하나였다. 베르펠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오스카상을 받은 ‘베르나데트의 노래’(The Song of Bernadette)의 원작자로서 유명하다. 더 유명한 것은 알마 쉰들러와 결혼한 것이다. 알마 쉰들러는 비엔나의 유명한 화가인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로서 처음에는 세기의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하였고 이어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과 결혼한 여인이다. 그러므로 알마 쉰들러의 이름은 ‘알마 말러-그로피우스-베르펠’이라고도 적어야 하지만 그러면 이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해서인지 일반적으로는 알마 말러-베르펠이라고 적는다. 화가로서 작곡도 했던 알마 말러는 화가인 오스카 코코슈카와의 정사(情事)로도 이름을 날렸다. 베르펠의 부인인 알마 말러에 대한 얘기는 이만 줄이고 베르펠에 대한 소개로 넘어가자.
베르펠은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베르펠의 아버지는 장갑과 가죽제품 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유태인이었다. 어머니 알비네 쿠씨(Albine Kussi)는 제분공장집 딸이었다. 베르펠은 삼남매의 첫째로서 두 여동생이 있었다. 베르펠은 프란츠 카프카, 막스 브로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기타 유태계 작가들과 친분을 맺으며 지냈다. 이들이야말로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위대한 지식인들이었다. 베르펠은 1차 대전중에 러시아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나중에는 비엔나에서 정훈장교로서 근무했다. 이때에 알마 말러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1920년 알마 말러는 베르펠과 결혼하기 위해 두 번째 남편이던 발터 그로피우스와 이혼하였다. 그때에 알마는 베르펠과의 사이에서 마르틴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마르틴은 미숙아로 태어나 얼마 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알마와 베르펠은 1929년에 결국 결혼하였다. 당시에 베르펠은 이미 저명한 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표현주의 희곡으로 독일어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작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것은 1933년에 발표한 The Forty Days of Musa Dagh(무사 다그의 40일)이라는 소설이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인종청소 음모를 다룬 작품이었다.
위대한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했다가 말러가 세상을 떠나자 건축가인 그로푸이스와 재혼하였고 그런중에 베르펠과 인연이 생겨 연애하다가 결국 결혼하였고 나치를 피하여 베르펠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정착했다.
유태인이었던 베르펠은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얼마후 나치는 프랑스를 점령하고 프랑스에 있던 유태인들을 색출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베르펠은 알마와 함께 다시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비시 정권하의 마르세이유에 있던 이들은 마침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바리안 프라이(Varian Fry)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로 가서 미국행 배를 탈수 있었다. 베르펠 일행이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나치의 추격을 피해 스페인에 도착한 것은 실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베르펠은 프랑스에 있을 때에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중 루르드(Lourdes)라는 마을에도 잠시 머무른 일이 있었다. 이곳에는 성모를 모신 작은 성당이 있었다. 베르펠은 이곳에서 영적인 안식을 경험했다. 그는 이곳에서의 경험을 글로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안전하게 건너간 후인 1941년 ‘베르나데트의 노래’를 발간했다. '베르나데트의 노래'는 명우 제니퍼 존스가 주연하여 오스카상을 받았다.
베르펠(뒷줄 왼편), 알마(뒷줄 오른편), 베르펠의 아버지와 어머니. 베니스여행중.
남부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베르펠은 그의 마지막 희곡인 Jacobowsky and the Colonel(Jacobowsky under der Oberst)를 완성하였다. 이 희곡은 1958년 다니 케이가 주연한 Me and the Colonel(나와 대령)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소설인 Star of the Unborn(Stern der Ungeborenen: 탄생하지 않은 별)을 초안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1년후인 1946년 발간되었다. 베르펠은 194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곳의 로젠데일(Rosendale)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나중에 비엔나로 옮겨져 현재 중앙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프란츠 베르펠과 알마 말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비엔나 출신의 화가, 조각가 편에사 '알마 말러'와 비엔나 출신의 음악가 편에서 '구스타브 말러' 편을 보시면 참고가 됩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프란츠 베르펠 묘지
프란츠 베르펠의 여동생인 한나 베르펠(나중에는 한나 푹스 로베틴: 1896-1964) 또한 이런 저런 사연으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현대음악 작곡가인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의 정부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알반 베르크는 한나 푹스 로베틴에게 '서정적 조곡'(Lyric Suite)을 비밀리에 헌정하였다. 그 사실은 1977년에 가서야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프라하에서 태어난 한나는 부유한 기업가인 루돌프 베르펠의 세 자녀 중 가운데이다. 한나의 오빠가 프란츠이며 여동생은 마리안네 아말리였다. 아버지의 선조는 독일-보헤미아 유태인이었다. 할아버지는 나폴레옹의 제정러시아 침공 때에 전령으로 참전했었다. 그 할아버지가 프라하에 와서 살기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프라하에서 무슨 사업을 하였으나 당장 실패하여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었다. 한나의 아버지가 다시 사업을 하였고 사업이 성공하여 재산을 모을수 있었다. 베르펠 가족들은 프라하 뉴 타운의 마리엔슈트라쎄에 있는 멋진 저택에서 살았다. 한나를 비롯한 베르펠의 아이들은 체코 가톨릭 교인인 어떤 보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 보모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자주 갔지만 베르펠은 안식일만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유태교 회당에 갔다. 아버지 루돌프 베르펠은 아이들을 유태인 사회에 동화되어 살도록 했다.
한나 베르펠 푹스 로베틴
한나는 허버트 푹스 로베틴이란 사람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 문초와 도도(도로테아)였다. 한나의 애칭은 모핀카였다. 남편은 프라하의 기업가로서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이었다. 한나는 1925년 5월부터 남편의 친구인 작곡가 알반 베르크와 비밀스럽게 사귀기 시작했다. 베르크는 이듬해에 '서정적 조곡'을 작곡하여 한나에게 헌정하였다. 이 조곡은 A-B-H-F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알반 베르크와 한나 푹스의 이니셜을 조합한 것이다. 이 조곡의 멜로디는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서정적 교향곡'(Lyric Symphony)으로부터 인용하였다. 원래 폰 쳄린스키의 '서정적 교향곡'은 You are mine own(당신은 오직 나의 것)이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알반 베르크는 '서정적 조곡'의 악보를 주해와 함께 한나에게 주었고 한나는 나중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 오리지널 악보를 딸 도로테아에게 주었다. 그러다가 현재는 비엔나의 오스트리아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알반 베르크가 '서정적 조곡'의 악보에 적어 놓은 주해 문구는 그냥 소개하고 싶어서 영어번역본을 소개한다.
It has also, my Hanna, allowed me other freedoms! For example, that of secretly inserting our initials, HF and AB, into the music, and relating every movement and every section of every movement to our numbers, 10 and 23. I have written these, and much that has other meanings, into the score for you. ... May it be a small monument to a great love. 각자 번역하시기 바란다.
한나 베르펠 푹스 로베틴에게 '서정적 조곡'을 헌정한 작곡가 알반 베르크
한나가 세상을 떠난지12년 후인 1976년에 베르크가 한나에게 보낸 14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발견되었다기 보다는 알려지게 되었다. 그중 몇 통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가지고 있었고 또 몇 통은 한나의 오빠 프란츠 베르펠의 부인인 알마 말러 베르펠이 가지고 있었다. 한나와 남편 허버트 푹스 로베틴은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압박을 피해서 요행으로 미국(뉴욕)으로 갈수 있었다. 남편 허버트는 1949년에 세상을 떠났고 한나는 남편보다 15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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