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2 알베르티나(Albertina)

정준극 2009. 7. 24. 12:12

참고자료 2

 

 

알벨르티나플라츠와

알베르티나(Albertina) 미술관

세계 최대의 그래픽 아트 미술관 

 

알베르티나 미술관 전경. 발코니의 기마상이 알베르트 대공이다

 

알베르티나플라츠(Albertinaplatz)는 알베르티나 미술관 앞의 작은 광장이다. 광장의 한쪽에는 자허(Sacher)호텔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른 쪽에는 로브코비츠(Lobkowitz)궁전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알베르티나플라츠에는 현대조각가인 알프레드 흐르들리카(Alfred Hrdlicka: 1928-)의 작품인 Mahnmal gegen Krieg und Fascismus(전쟁과 파시슴을 경계하는 기념물)가 설치되어 있다. 알베르티나플라츠라는 이름이 비롯된 알베르티나는 세계 최대의 그래픽 미술관이다. 이곳에는 약 6만5천점의 소묘와 약 1백만점의 판화, 그리고 사진작품과 현대 그래픽작품 및 건축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소묘 작품은 주로 성경책의 표지에 그려져서 사랑을 받고 있는 알프레드 뒤러의 ‘기도하는 손’, 그리고 ‘산토끼’(Feldhase) 등이다. ‘전쟁과 파시슴을 경계하는 조형물’에 대하여는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다.

 

알베르트 궁전의 어떤 방

 

원래 알베르티나플라츠가 있는 자리에는 필립피호프(Philippihof)라는 경마클럽이 있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밤, 수백명의 시민들이 폭격을 피하려고 방공호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의 지하에 모여 있었다. 불행하게도 두발의 직격탄이 건물에 떨어져 지하 방공호에 있던 시민들 중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확히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전쟁이 끝난후 비엔나 시는 필리피호프가 있던 자리를 광장으로 만들고 그곳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을 설치키로 했다. 알프레드 흐르들리카라는 청년 조각가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몇 개의 큰 기둥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고 이에 곁들여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유태인 노인의 형상도 제작하였다. 대부분 관광객들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유태인의 형상을 보고 이것이 홀로코스트에 의한 유태인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조형물로 생각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알베르티나플라츠에 설치되어 있는 '전쟁과 파시슴을 경계하는 기념물 '중 꿇어 엎드린 유태 노인'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건물은 원래 17세기 후반에 건설된 궁정건축사무소(Hofbauamt)였다. 1745년 궁정건축사무소장인 실바-타루카(Silva-Tarouca)의 엠마누엘 텔레스(Emanuel Teles)백작이 궁정건축사무소를 개축하여 자기의 저택으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이 건물은 팔레 타루카(Palais Tarouca)라고 불려졌다. 1768년 작센-테센(Saxen-Teschen)의 알베르트(알브레헤트) 공작이 팔레-타루카를 인수하여 저택으로 삼았다. 알베르트 공작은 유명한 샤를르 대공의 동생으로 역시 합스부르크를 위해 위대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특히 알베르트 공작은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딸인 마리-크리스틴(Marie-Christine)과 결혼하여 영광스런 위치에 있게 되었다. 알베르트 대공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으로서 브뤼셀에 주재하고 있었다. 팔레-타루카를 인수한 알베르트 공작은 그의 소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궁전을 확장하였다. 그렇게 하여 알베르트의 궁전은 호프부르크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하게 되어 마치 호프부르크를 수비하는 보루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알베르트 공작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손들도 열심히 그래픽 작품을 수집하여 소장품은 날로 증가하였고 이에 맞추어 궁전도 확장되었다. 알베르트 가족이 수집한 에칭, 소묘 등의 작품은 라파엘, 렘브란트, 뒤러, 쉴레, 루벤스, 보슈(Bosch), 브뤼겔, 세잔느, 피카소, 마티스, 코코슈카, 클림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발간된 소장품 목록집을 보면 마치 세계의 유명 예술가들의 이름이 모두 집합된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알브레헤트 대공의 수집폭은 넓었다.

 

알베르티나 앞의 다누비우스 분수

 

알베르트 공작의 그래픽 수집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있다. 제노아 출신으로 베니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자코모 두라쪼(Giacomo Durazzo)백작이었다. 1776년 두라쪼 백작은 그가 수집한 약 1천점의 그래픽, 소묘 작품을 알베르트 대공과 마리-크리스틴 대공부인에게 기증하였다. 제노아 총독인 마르첼로 두라쪼의 형이기도 했던 자코모 두라쪼 백작은 자기가 수집한 예술작품을 알베르트 대공에게 기증하면서 이 작품들이 예술을 애호하는 후세들을 위해 보람있게 사용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특히 젊은 미술학도들을 위한 교육용으로 이용되기를 바랐다. 이에 따라 알베르트 대공은 자기의 궁전을 개조하여 미술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현실화 되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1차 대전이 막을 내린 이듬해인 1919년, 우리나라에서는 삼일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비엔나에서는 합스부르크 소유의 알베르트 궁전이 새로 출범한 공화국의 소유로 이관되었다. 이어 1920년에는 알베르트 대공이 수집한 그래픽 작품과 과거 제국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그래픽 작품들을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드디어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문을 열게 되었다. 전체 소장품 중에서 우선 일부만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래픽 작품들은 빛에 예민할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도 대부분 얇은 종이에 그린 것이기 때문에 훼손될 가능성이 높아서 조심해야 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연합군의 포격으로 크게 손상되었다. 정부 당국은 수많은 전후 복구사업 때문에 알베르티나 미술관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1996년부터 복구에 들어가 2003년 완성되었다. 한편,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2000년 1월 1일, 연방박물관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원래 알베르티나는 2002년 오픈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건물의 지하에서 로마시대의 공동묘지가 발견되는 바람에 건물은 복원되었으나 다시 미술관의 현대화 공사에 들어가 결국 정식으로 오픈하게 된 것은 2008년이었다. 알베르티나에 대한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외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으며 테라스에는 마치 지붕과 같은 조형물이 제작되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개관 기념 기획전으로 2006년에 피카소 전시회를 가졌으며 2008년에는 고흐전시회를 가졌다. 그런데 2009년 6월에 뜻하지 아니한 일이 생겼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전시장에 비가 샌 것이다. 일단 대처는 했지만 다시 손을 보아야 할데가 많이 생겼다. 95만점에 이르는 작품들을 다른 곳으로 안전하게 옮기는 일이 남았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입구

알베르티나 미술관에는 약 4만1천점의 소묘와 수채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300권 이상의 스케치 북, 90만점의 판화가 있다. 건축과 관련한 작품은 약 4만 3천점이며 그 중에는 건축 모델도 상당히 있다. 사진은 약 5천점이 있으며 사진 장비와 사진작품집도 상당히 있다. 유로화가 통용되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20실링 지폐의 뒷면에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현관 앞 테라스에는 알베르트 대공의 기마상이 서 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피터 파울 루벤스, 오스카 코코슈카, 렘브란트, 알브레헤트 뒤러, 구스타브 클림트, 에곤 쉴레 등의 그래픽 작품을 더 구매할 계획으로 이미 대상 작품의 감정에 들어갔다.

 

알베르트 궁전의 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