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4
바벤버그 궁전이 있던 장소
암 호프(Am Hof)
암 호프교회와 광장의 시장
암 호프는 ‘궁전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비엔나의 암 호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이다. 바벤버그 왕조가 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정하고 처음으로 궁전을 지은 곳이기 때문이다. 암 호프는 비엔나 제1구에서 가장 넓은 플라츠(광장)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거리와 연결되어 있다. 보그너가쎄, 나글러가쎄, 하이덴슈쓰, 홰르버가쎄, 유덴플라츠, 슐호프가 암 호프와 연계되어 있다. 암 호프는 중세에 게토(유태인 집중 거주지역)와 이웃하고 있었다. 암 호프는 로마제국 시절, 빈도보나(Vindobona) 수비대의 일부가 주둔했던 곳이며 중세초기 이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암 호프 교회
1155년부터 1280년경까지 암 호프에는 바벤버그(Babenberg) 왕조의 궁전이 있었다. 1155년에 유명한 하인리히2세 야소미어고트 공작이 비엔나에 정착할 목적으로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이곳을 처음에는 바벤버거플라츠(Babenbergerplatz)라고 불렀으나 차츰 암 호프라고 부르게 되었다. 야소미어고트 공작과 그의 부인 테오도라(Theodora)가 1165년 제3차 십자군전쟁에서 성지를 탈환하고 돌아오는 독일의 프레데릭 바바로싸 황제를 열렬하게 환영하였던 곳도 바로 암 호프였다. 하인리히 공작의 아들인 레오폴드 5세 시대에는 암 호프가 중세 마상무술시합을 벌이던 곳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시장이 들어서고 각종 공연이 성행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암 호프를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유명한 가수 겸 시인인 라이마르 폰 하게나우(Reinmar von Hagenau)와 그의 제자인 발터 폰 데어 보겔봐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가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노래를 불렀던 곳도 암 호프였다.
암 호프 광장과 마리아탑
14세기에 암 호프 광장은 시장이기도 했지만 형장이기도 했다. 1463년 비엔나 시장이던 볼프강 홀처(Wolfgang Holzer)가 알브레헤트 6세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한 것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훨씬 훗날인 1848년 10월에 성난 시민들이 전쟁장관인 라투르(Latour)백작을 죽이고 그 시신을 매달아 놓은 곳도 이곳이었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곳은 흥미롭게도 크렙스마르크트(Krebsmarkt)라고 불린 일이 있다. 바다가 없는 나라에서 저 멀리 지중해로부터 게(크렙)와 생선을 가져와서 팔았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당시 게는 고급요리였다. 크렙이라는 단어는 고급이라는 단어와 같은 뜻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암 호프 주변의 상점 중에는 크렙약국(고급약국), 크렙식품점 같은 간판이 남아 있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야채와 과일만을 파는 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생선시장이다 보니 냄새고 심했고 개중에는 상한 것들이 많아서 그걸 집어 먹은 개와 고양이 및 일부 시민들이 식중독으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암 호프 광장의 한편에 있는 소방서
1554년 암 호프의 교회와 수도원이 예수회로 소속이 바뀌게 되자 이곳의 이름은 Bei den oberen Jesuiten(바이 덴 오베렌 예수이텐: 예수회제1교회)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암 호프 광장의 한 부분인 교회 앞에서는 성극(聖劇)이 주로 공연되었다. 1773년 이곳에서 예수회가 철수하게 되자 광장의 명칭은 다시 암 호프로 환원되었다. 예수회 수도원 건물은 1783년부터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제국전쟁성과 황제전시자문위원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예수회가 물러나기 바로 직전인 1782년에는 교황 비오 6세(Pius VI)가 암 호프 교회의 발코니에 나와서 운집한 군중들에게 강복을 하였다. 암 호프의 사건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1806년 8월 6일, 프란시스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제국의 종말을 고하는 칙령을 발표한 곳이 바로 암 호프 교회의 현관 주랑(柱廊)이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가 관리하였던 5백년에 걸친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은 왕실창고로 들어가게 되었다.
암 호프의 시민병기고 건물과 비엔나 소방서. 병기고 건물 상단의 조각이 대단하다.
1848년 3월 혁명이후 암 호프는 혁명분자들의 단골 집회장소가 되었다. 그해 3월 14일 반정부 혁명주의자들은 광장의 한쪽에 있는 무기고(Zeughaus)를 습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사태는 안정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 악화되어 갔다. 그해 10월 6일, 성난 군중들이 전쟁성에 진입하여 전쟁장관인 테오도르 베이예 폰 라투르(Theodor Baillet von Latour)백작을 끌어내어 린치를 가하여 죽게 하고 그를 가로등에 매달아 백성의 적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모두에게 보였다. 그로부터 이 광장은 잠시나마 폭스플라츠(Volksplatz: 민중광장)이라고 불렸다. 1842년부터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그리고 독일과의 합병 이후인 1939년부터 전쟁중인 1942년까지 암 호프는 크리스마스 시장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암 호프에서는 아무런 활동이 없다가 1973년부터 주말에 벼룩시장이 열리기 시작했으나 1977년부터는 나슈마르크트(Naschmarkt)로 집단 이전하여 현재는 주말에 간소한 벼룩시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해마다 11월이면 시청광장(Rathausplatz)에 버금하는 활기에 넘친 크리스마스 시장이 들어선다.
암 호프 광장에 있었던 라데츠키 장군 기마상. 칼 벤첼 타이지크 그림
1892년 암 호프의 한 가운데에 라데츠기 장군의 기마상이 들어섰으나 1912년 슈투벤링의 정부종합청사 건물 앞으로 이전되었다. 1948년 캐롤 리드(Carol Reeds)의 영화 ‘제3의 사나이’(Der dirtte Mann)에는 암 호프 광장이 자주 등장한다. 암 호프 광장의 한쪽에 있는 하수도 연결구를 통해 지하 하수도에 들어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1962년 암 호프의 지하주차장 건설 중 로마유적이 발견되었다. 현재 소방서 건물의 지하에서 수로가 발견된 것이다. 수로는 티퍼 그라벤(Tiefer Graben)을 거쳐 저 멀리 오타크링(Ottakring)까지 연결되는 것이었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암 호프의 교회에서 부활절 강복을 하였다. 선배 교황들이 암 호프 교회에서 강복했던 관례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2007년 9월 7일,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역시 암 호프 교회를 찾아왔다. 7천명의 신도들이 교황의 강복을 받으려고 운집하였다. 교황이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는 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마이크가 불통이 되었다. 교황은 약 6분간 아무도 듣지 못하는 혼자만의 연설을 하였다. 사람들은 교황의 강복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암 호프에서 보그너가쎄 쪽을 바라본 곳의 아름다운 건물. 비네나의 노이슈반슈타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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