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25
독토르 칼 루에거 링과
비엔나 시장 독토르 칼 루에거(Dr-Karl-Lueger)
칼 뤼거(루에거) 시장
칼 루에거 비엔나 시장에 대하여 쓰지면 한량이 없기 때문에 아주 간단히 소개코자 한다. 칼 루에거는 1844년 10월 24일 뷔덴(Wieden)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뷔덴이 비엔나 교외였지만 지금은 비엔나의 도심에 속한 행정구역이다. 칼 루에거의 아버지는 비엔나 폴리테크니쿰(공과대학)의 하급직원(수위)이었다. 어머니는 비엔나에서 옷장을 만들어 파는 목수의 딸이었다. 칼 루에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에 살다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비엔나로 올라 왔다. 루에거의 아버지가 취직한 곳은 비엔나폴리테크니쿰이었다. 오늘날 칼스플라츠에 있는 비엔나공과대학의 전신이다. 칼 루에거는 바로 비엔나공과대학의 한쪽 구석에 있는 직원숙사에서 태어났다. 칼 루에거의 아버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아들의 공부를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결과, 칼 루에거는 테레지안 기사학교(Theresianische Ritterakademie)에 들어 갈수 있었다. 다만, 정규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이었다. 테레지안 기사학교는 오늘날의 명문 테레지아눔(Theresianum)이다. 어찌 되었든 이곳을 거친 칼 루에거는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법률을 공부했고 1870년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가톨릭학생연맹에 가입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당시의 학생운동은 제국에 대한 반대와 헝가리의 독립분리를 주장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1874년 칼 루에거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수상실에 근무하면서 주로 소시민들을 위한 권익옹호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로부터 칼 루에거는 서민들의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라트하우스에서의 칼 루에거 시장 주최의 무도회
1875-76년, 1878-1910년간 그는 비엔나 시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1885-1891년에는 비엔나 제5구에서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로부터 칼 루에거의 정치인생이 시작되었으며 기독교사회당을 창당하여 당수로서 저소득층을 위한 많은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와중에서 그는 반유태주의적인 정책을 보여주어 오스트리아 국수주의자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유태인 등 소수민족으로부터는 비난을 받았다. 칼 루에거는 1897년 비엔나 시장에 선출되었다. 비엔나 시장은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 당시 프란츠 요셉 황제는 칼 루에거의 지나치게 파격적인 서민정책, 그리고 학생시절의 반정부운동을 했던 전력때문에 시장 임명을 주저하였다. 그래서 칼 루에거는 비엔나 부시장으로서 임명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칼 루에거에 대한 임명을 몇 번이나 재가하지 않았으나 사민당의 요구가 너무 집요하여 결국 승낙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칼 루에거는 무려 4선의 비엔나 시장이 되었다.
중앙공동묘지의 칼 뤼거 교회(칼 보로메우스교회라고도 함)
칼 루에거는 비엔나 시장에 취임하자 공공사업에 크게 주력하여 상하수도, 전기, 가스, 도로 확장등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으며 특히 공원의 확장을 기하였다. 칼 루에거는 비엔나를 인구 4백만의 도시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아무튼 이로써 비엔나의 구역은 확대되었고 시민들의 생활은 개선되었다. 시민들은 칼 루에거를 '비엔나의 신'(God of Vienna)라고까지 불렀다. 시민들이 루에거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루에거 숭배’(Lueger Kult)라고 한다. 그는 191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동안 비엔나 시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서민정책과 반유태정책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히틀러는 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비엔나에 와서 지내고 있었다. 칼 루에거는 1910년, 아직도 비엔나 시장일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애도를 표명했다. 아돌프 히틀러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중앙공동묘지의 칼 보로메우스교회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이 교회는 칼 루에거가 시장으로 재직중에 건설한 것으로 일명 칼 루에거박사교기념교회(Dr-Karl-Lueger-Gedächtniskirche)라고도 부른다.
독토르 칼 루에거 플라츠에는 칼 루에거 시장의 기념상이 서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비엔나는 나치의 잔영을 없애기 위해 나치가 만들었던 거리 이름과 기념상 등을 변경하고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친나치청산작업이었다. 칼 루에거를 기려서 붙인 거리 이름과 기념상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친나치성향, 그리고 반유태성향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비엔나를 위해 기여한 점도 결코 무시할수 없었다. 독토르 칼 루에거 링과 칼 루에거 기념교회, 칼 루에거 기념상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독토르 카를 루에거 링은 2012년부터 우니페어지태트링으로 변경되었다.)
부르크테아터 앞의 칼 루에거 링은 우니페어지태츠링으로 바뀌어졌다. 비엔나의 시민들이 의미있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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