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27 니콜라우스 폰 둠바(Nikolaus von Dumba) & 비엔나 음악연맹

정준극 2009. 7. 30. 16:29

침고자료 27

 

둠바슈트라쎄와

니콜라우스 폰 둠바(Nikolaus von Dumba)

 

  

니콜라우스 폰 둠바

 

임페리얼 호텔 옆, 비엔나 악우회 건물로 가는 길이 둠바슈트라쎄이다. 니콜라우스 폰 둠바를 기념하여서 붙인 거리이름이다. 그리스계 오스트리아인인 니콜라우스 폰 둠바(1830-1900)는 기업가 겸 정치가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단한 음악후원가였다. 음악후원가로서 그는 비엔나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음악의 친구협회: 악우회)의 부회장을 맡아 이 협회를 크게 후원하였다. 예를 들면, 링슈트라쎄에 있는 그의 저택인 팔레 둠바(Palais Dumba)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대표작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초연될 정도였다. 폰 둠바는 대단한 음악자료의 수집가였다. 그는 슈베르트의 친필 악보 200여점을 비롯한 수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세상을 떠날 때에 유언을 통하여 이를 모두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국립도서관은 폰 둠바의 기증 자료를 기반으로 세계 제일의 음악가 친필 악보의 소장기관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폰 둠바가 기증한 음악자료들은 라트하우스의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다.

 

파르크링 4번지에 있는 팔레 둠바의 내부

                           

니콜라우스 폰 둠바의 부모는 북부 그리스의 블라스티(Vlast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1817년 비엔나로 이주하여 옷감장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13년후인 1830년, 비엔나에서 아들 니콜라우스가 태어났다.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그의 부모는 그를 명문인 비엔나 아카데미 김나지움에 보냈다. 베토벤플라츠 옆에 있는 건물이다. 1847-48년의 혁명기간 중에 그는 동생 미하엘과 함께 프로케슈-오스텐스(Prokesch-Ostens)백작이 인솔하는 오스트리아의 아테네 사절단의 멤버로 참여하였다. 처음으로 부모의 고국, 즉 자기의 고국을 방문한 그는 그리스의 아름다운 문화와 민속예술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음악에 대한 그의 식을줄 모르는 열정은 시작되었다. 1852년에는 유명한 탐험가이며 여행가인 알렉산더 치글러(Alexander Ziegler)와 함께 이집트를 여행하였다. 동방에 대한 여행은 그에게 음악자료를 수집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폰 툼바는 청년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이 깊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계를 이어 받아 상인이 되기를 원했다. 폰 둠바는 직물무역업을 통하여 많은 재산을 모을수 있었다. 폰 둠바는 사촌인 테오도르(Theodor)에게 니더 외스터라이히의 타텐도르프(Tattendorf)에 있는 k.k. priv. Baumwollgarn-Spinnerei(면직물 방직공장)를 떠맡아 운영토록 하였다. 이 공장은 종업원 180명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둠바슈트라쎄에 있는 비엔나 악우회 건물. 빈필의 본부이며 비엔나신년음악회의 장소이다.

                   

폰 둠바는 1865년 당대의 콤비건축가인 요한 로마노 폰 링게(Johann Nomano von Ringe)와 아우구스트 슈벤덴봐인 폰 로나우버그(August Schwendenwein von Lonauberg)에게 의뢰하여 링슈트라쎄에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팔레 둠바를 건설하였다. 폰 둠바의 아들 콘스틴틴 둠바(Konstantin Dumba)는 외교관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평화주의자로 활동했다. 폰 둠바는 비엔나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임은 성게오르그(St Georg)협회의 창설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비엔나악우회의 부회장을 맡아했다. 1870년 그는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896년까지 활동하면서 주로 재정문제, 교육문제, 극빈자 문제 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목사가 이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물포에 처음으로 도착했던 해에 프란츠 요셉 황제는 폰 둠바를 귀족원(Herrenhaus: 상원)의 평생회원으로 임명하였다. 1890년 7월, 폰 둠바는 비엔나의 명예시민으로 추앙되었다. 오늘날 비엔나 악우회가 있는 거리이름은 폰 둠바를 기려서 둠바슈트라쎄라고 부른다. 이밖에도 오스트리아의 여러 곳에 폰 둠바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가 있다. 1900년 3월 23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중앙공동묘지(32A 구역 25번)에 안장되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니콜라우스 둠바 묘지. 음악가 묘역의 브람스 옆에 조성되었다.

 

비엔나 음악연맹(Wiener Musikverein)

 

세계적인 비엔나 악우회(Wiener Musikverein: 비엔나 음악연맹)의 콘서트하우스는 임페리얼 호텔의 뒤편, 뵈젠도르퍼슈트라쎄와 칼스플라츠 사이의 둠바슈트라쎄에 있다. 둠바슈트라쎄는 음악애호가이며 후원가인 니콜라우스 폰 둠바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 이름이다. 사람은 가도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은 오래동안 남는 법이다. 무직페어라인 건물의 뒤편 길은 카노바가쎄(Canovagasse)이다. 당대의 조각가인 베니스 출신의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를 기려서 붙인 거리이름이다. 아우구스틴교회의 마리 크리스틴 영묘는 카노바의 작품이다. 무직페어라인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유명한 비엔나 콘서트하우스(콘서트홀) 자체를 의미한다. 비엔나필(빈필)의 본부로서 빈필의 정기연주회가 열리는 장소이며 세계적인 비엔나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장소를 말한다. 또 다른 의미는 글자그대로 음악친구(애호가)들의 협회(악우회: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Society of Music Lovers)이다. 법인체인 악우회는 콘서트 하우스 건물의 운영주이다.

 

비엔나악우회 황금홀. 벽면에 있는 황금여신상들 때문에 황금 홀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원래는 대연주회장.

                       

비엔나 악우회 콘서트하우스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기증한 땅에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가 주관하여 건설했다. 개관식은 1870년 1월 6일 프란츠 요셉 황제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90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유명 기업인 리거(Rieger)가 대형 파이프오르간을 기증하여 설치되었다. 콘서트홀은 음향이 훌륭하기로 유명하다. 미국 보스턴의 심포니 홀,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헤보우(Concertgebouw) 홀과 함께 세계 3대 최고음향시설의 연주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황금홀의 오르간

               

콘서트하우스의 자랑은 그로쎄 무직페어라인스잘(Grosse Musikvereinssaal)이라고 부르는 황금홀(Goldene Saal)이다. 홀의 양쪽 객석에 황금여신상들이 줄지어 서있기 때문에 황금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금홀은 길이 48미터, 넓이 19미터, 높이 18미터의 연주회장으로 1,744석이며 입석은 3백개이다. 이곳에서 비엔나신년음악회가 열린다. 좌석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신년음악회의 티켓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비엔나 악우회 콘서트하우스는 2001년부터 대대적인 개수 작업에 들어가 기존의 소연주회장 이외에도 몇 개의 소연주회장을 완비하게 되었다. 6백석의 브람스잘(Brahmssaal), 380석의 글래제르너 잘(Gläserner Saal: Magna Auditorium), 70석의 메탈레너 잘(Metallener Saal), 60석의 슈타이네르너 잘(Steinerner Saal)이다.

 

 비엔나 악우회 황금홀에서는 거의 매일 저녁 관광객들을 위한 모차르트-요한 슈트라우스 연주회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