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30 에쓸링-아슈페른 전투(Schlacht von Essling und Aspern)

정준극 2009. 8. 1. 04:46

참고자료 30

 

에쓸링가쎄와

에쓸링-아슈페른 전투(Schlacht von Essling und Aspern)

 

1809년 5월 21-22일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제국군과 나폴레옹군의 에쓸링-아슈페른 전투는 양진영이 운명을 건 중요한 전투였다.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측이 입은 손실은 엄청났다. 단 이틀동안에 오스트리아군은 6천2백명이 전사했거나 실종되었으며 나폴레옹군은 7천명이 전사했다. 시체는 산을 이루었고 흘러내리는 피는 강을 이루었다. 도나우강은 빠져 죽은 병사들과 군마로 인하여 강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샤를르 대공이 전투를 지휘했고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직접 지휘했다.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유럽을 호령한지 10년만에 처음으로 커다란 패배를 맛보았다. 비엔나 시는 아슈페른-에쓸링 전투를 기념하여 뵈르제플라츠 옆의 거리를 에쓸링가쎄라고 이름 붙이고 아슈페른의 성마르틴교회에 전사자 추모 기념물을 설치했다. 애통하는 사자상이다.

 

 아슈페른-에쓸링전투에서 군기를 잡고 선두에서 돌격을 독려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샤를르 대공

 

전투가 일어날 즈음에 나폴레옹은 이미 비엔나를 점령하고 있었다. 도나우를 건너 비엔나로 들어가는 다리는 모두 나폴레옹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샤를르 대공의 군대는 도나우 좌안에 있는 코르노이부르크(Korneuburg) 부근의 비잠버그(Bisamberg) 언덕에 주둔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샤를르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도나우를 건너야 했다. 나폴레옹군은 도나우의 중간에 있는 로바우(Lobau)라는  섬을 도강장소로 선정했다. 도나우에는 여러 섬들이 있어서 작은 지류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공병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교량을 설치하고 로바우 섬을 장악하였다. 5월 20일 아침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로바우 섬에 프랑스군의 주력이 거의 집결했다. 나폴레옹은 그날 밤으로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좌안으로 교량을 건설하여 도강한후 마르흐펠트에 본영을 설치코자 했다. 그리하여 마쎄나(Massena)장군의 부대가 선봉을 서서 도나우의 좌안에 상륙하고 계속하여 오스트리아 전초기지를 향하여 공격하며 나아갔다. 마침 그때 나폴레옹에게는 프랑스군의 배후에서 티롤군과 보헤미아군이 공격해 오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나폴레옹은 우선 눈 앞의 샤를르 대공의 군대부터 격퇴해야할 형편이었다. 나폴레옹은 전 병력을 한곳으로 집결하여 일순간에 공격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4만명의 병사들에게 도나우를 도강토록 명령했다. 5월 21일 새벽, 4만의 프랑스 병력이 도나우 좌안의 드넓은 평지인 마르흐펠트(Marchfeld)에 집결했다. 이곳은 훗날 유명한 바그람(Wagram)전투가 벌어지게된 전장이었다.

 

에쓸링전투에서 프랑스의 장 란느 장군

 

샤를르 대공은 프랑스군이 도강하여 마르흐펠트에 병력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지만 이를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샤를르 대공은 대다수 프랑스 병력이 도강한 후에는 후방 지원군이 없을 것이므로 그 틈을 타서 일시에 공격할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르 대공의 그같은 전략을 알아챘지만 후방의 티롤군과 보헤미아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위험성을 감수하고라도 도강작전을 감행하였다. 나폴레옹은 오히려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일거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할 생각이었다. 교량을 건너 왼편에 있는 마을이 아슈페른(Aspern)이었고 오른편이 에쓸링(Essling: 또는 에쓸링겐)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이 두 마을의 외곽에 각각 대규모 병력으로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으로서는 어쩔수 없이 병력을 나누어 두 마을을 동시에 공격해야했다. 그러다보니 병력이 격리될 수밖에 없었다. 뒤에 따라오는 지원부대도 두 마을로 분산되어야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요한 폰 힐러(Johann von Hiller) 장군으로 하여금 아슈페른에 밀려온 프랑스군을 공격키로 했고 로젠버그 공자(Prinz Rosenberg)로 하여금 에쓸링을 공격토록 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아슈페른과 에쓸링에는 짙은 전운이 감돌았다. 멀리서부터 포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일렬로 서서 상대방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아슈페른과 에쓸링의 가운데 지점에는 샤를르 대공이 직접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은밀하게 자리 잡고있었다. 만일 프랑스 기병대가 중앙으로 돌진해 온다면 어느 때라도 반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21일 하루 종일, 그리고 밤중까지도 다리를 건넜다. 주로 대포를 끌고 다니는 포병과 군수부대의 도강이 어려움을 겪었다.

 

[21일의 전투]

전투는 아슈페른에서 시작되었다. 힐러 장군의 군대가 아슈페른에 진격하여 이미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삽시간에 아슈페른을 장악했지만 곧이어 프랑스군의 마쎄네 장군이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아슈페른에서는 전진하고 후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우직하게 전진만하는 병사들은 우수수 쓰러져갔다. 특히 프랑스 보병의 무조건적인 전진은 고집스러울 정도였다. 프랑스군은 일렬로 행군하면서 차례로 사격하는 전통적인 전법만을 고수하였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기습으로 프랑스군의 우직스러운 진격에 맞섰다. 저녁이 되었다. 아슈페른은 아직도 마쎄네 장군의 수중에 있었다. 두 마을의 중간에 집결해 있던 프랑스 보병은 이제 완전히 두 마을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양 날개를 치자는 나폴레옹의 전법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가운데의 공간에는 기병을 포진시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진지를 제압할 심산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포병은 장사진처럼 긴 형태로 늘어서서 아슈페른과 에쓸링에 포탄을 퍼붓고 있었다. 프랑스 기병대의 첫 번째 돌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 포병의 집중 포격을 받아 더 이상 돌격할수 없었다. 두 번째 돌격은 성과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진지를 거침없이 휘저으면서 포병을 유린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프랑스 기병대는 많은 손실을 입고 원래의 위치로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편, 에쓸링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슈페른과는 아무런 연결도 없이 격리된 채 전투가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창기병들은 로젠버그 공자 진영의 한쪽 날개를 공격하였다. 에쓸링에서는 프랑스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밤이 되어 두 진영은 서로 진지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에쓸링만이라도 점거하고 싶었다. 그래서 밤을 틈타 더 많은 병력을 에쓸링으로 집합시켰다.

 

프랑스군의 큐라씨에(Curassier) 기병들

 

[22일의 전투]

22일 새벽에 전투는 어느 틈에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의 마쎄나 부대가 아슈페른의 오스트리아 진영을 기습하여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한편 에쓸링에서는 로젠버그 공자의 부대가 프랑스군을 유린하였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저지코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생 힐레어(St Hilaire)군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하여 가까스로 로젠버그 군대를 퇴각토록 했다. 아슈페른에서는 힐러와 벨레가르데(Bellegarde)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이 마쎄나의 군대를 거의 완전히 몰아내었다.

 

한편, 이날 나폴레옹은 일대 용단을 내려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에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 진영의 중군 전부와 예비로 남겨둔 기병대를 공격에 가담토록 했다. 오스트리아의 전선은 중앙이 돌파되어 좌측의 로젠버그와 우측의 호엔촐러른(Hohenzollern)의 군대가 갈라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그때 샤를르 대공이 마지막 남은 예비병력을 지휘하여 진격해 왔다. 샤를르 대공은 제일 선두에서 군기를 휘어잡고 병사들을 독려하며 진군해 왔다. 프랑스군은 삽시간에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얼마후 아슈페른의 프랑스군은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슈페른을 잃었다는 뉴스가 나폴레옹에게 전해졌다. 도나우강의 임시교량을 이미 파괴되어 후퇴할수도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이 야간에 큰 바지선을 흘려내려 보내 임시교량을 파괴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즉시 공격을 중지하였다. 한편, 에쓸링은 로젠버그 공자에게 점령되었으나 프랑스군이 반격하여 되찾았다. 로젠버그 군대는 란느(Lannes) 장군이 프랑스군의 전선을 겨우 지켜내고 있었다. 양측은 모두 지쳤다.

 

프랑스군은 2만명 이상을 잃었다. 나폴레옹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며 친구인 장 란느(Jean Lannes)도 전사했다. 오스트리아군도 비슷한 숫자의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계속 패배만 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처음으로 나폴레옹군을 격퇴하고 씻을수 없는 손실을 안겨주었다.

 

아슈페른-에쓸링 전투에서 전몰한 오스트리아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자상. 애통하는 사자는 오스트리아제국을 표현했다. '1809년 5월 21일과 22일 명예스럽게 전사한 오스트리아 용사들을 추모하여'라고 적혀 있다.